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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개혁과 신돈, 신진사대부의 부상 :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변화

이모는오늘도 2025. 10. 15. 10:00

 

 

 

 

목차

     

     

     

    고려 말은 정치적 혼란과 외적 침략, 그리고 사회 구조의 깊은 부패가 뒤엉킨 시기였습니다. 그 중심에 공민왕의 개혁과 이를 뒷받침한 신돈, 그리고 새로운 정치 세력인 신진사대부의 등장이 있었습니다. ‘공민왕 개혁’, ‘신돈’, ‘신진사대부’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한 이 시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공민왕의 개혁과 신돈, 신진사대부의 부상 :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변화 / 공민왕 초상

     

     

    공민왕의 즉위와 과감한 개혁의 시작

    공민왕(재위 1351~1374년)은 원나라의 간섭과 고려 사회를 지배하던 권문세족의 횡포를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나라를 새롭게 일으키려 했습니다. 즉위 직후 그는 친원 세력을 정리하고,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제·의복·연호 등을 고려식으로 되돌렸습니다. 특히 부패한 권문세족의 토지ㆍ노비 문제 해결, 그리고 새로운 인재 등용이 그의 핵심 목표였습니다.

     

    당시 ‘권문세족’은 대규모 토지를 불법으로 점유하고 다수의 농민과 노비를 소유해 막강한 경제·정치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의 세입이 줄고 농민들은 극심한 부담에 시달렸습니다. 공민왕은 이러한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불법으로 빼앗긴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데 앞장섰으며,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소유한 노비를 해방하려 했습니다. 이는 국가 재정 기반을 확충하는 동시에, 사회 전반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시도였습니다.

     

     

    ** 공민왕 개혁 주요 정책

    • 반원정책(원나라 영향 청산) : 친원파 숙청, 몽골식 풍습 철폐, 정동행성 폐지, 왕실의 호칭·관제 복구
    • 영토 회복 : 쌍성총관부 공격 및 철령 이북 영토 회복
    • 정치 개혁 : 권문세족 타파, 정방(인사조직) 폐지, 유교적 성향의 신진사대부 등용
    • 사회·경제 개혁 : 전민변정도감 설치(불법 토지·노비 환수), 농민 경제 회복 추진
    • 불교 개혁 : 권문세족과 결탁한 부패한 불교 특권 억제
    • 외교 정책 : 명나라와의 외교 강화로 국제적 자주성 확보

     

    ** 공민왕 개혁 주요 정책 연도별 흐름 정리

    연도 주요 정책과 사건
    1351 (즉위) 고려 왕실 자주성 회복, 몽골식 풍속·복장 금지, 정동행성 폐지, 친원파 숙청
    1352 전민변정도감 설치(1차, 권문세족 토지·노비 환수 시도)
    1356 쌍성총관부 수복, 영토 회복, 본격적 반원정책 전개
    1366 전민변정도감 재설치(신돈 등용으로 개혁력 강화, 신진사대부 성장)
    1374 공민왕 암살, 개혁 중단

    참고 사항

    • 신돈은 1366년 이후 전민변정도감 개혁의 실질적 책임자로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농민 경제의 기반을 일부 회복함.
    • 개혁은 권문세족과 보수파의 격렬한 저항, 홍건적·왜구 침입 등 외적 위기로 완전한 성공을 이루지 못함.

    이 표와 설명을 활용하면 공민왕 개혁의 정책적 흐름과 시대적 배경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공민왕의 개혁은 대외적 자주성 회복, 권문세족 타파, 신진사대부 육성, 경제·사회 개편을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아래에 주요 정책과 연도별 흐름을 정리합니다.

     

     

    신돈의 등장과 개혁 추진

    공민왕의 개혁 중심에는 승려 출신 관료 신돈이 있었습니다. 신돈은 기존 기득권층과 무관한 배경 덕에 현실 개혁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낙점되었습니다. 그는 원래 이름이 ‘피찬’으로, 불교와 유교 교학에 모두 능통했으며 강직하고 개혁 성향이 강했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을 총애하며 개혁의 실무를 맡겼습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서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와 노비를 조사·환수하는 일을 지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부당하게 빼앗긴 땅을 되찾았으며, 국가 재정도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권문세족의 거센 반발과 정치적 음모로 인해 신돈의 활동은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신돈 자신도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독단적 행보와 부패 의혹이 제기되며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게 됩니다.결국 신돈은 제거, 공민왕도 시해되면서 본격적인 개혁에는 한계가 드러나게 됩니다.

     

     

    ** 전민변정도감의 연도별 주요 결정 사례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 반복적으로 설치된 임시 개혁 기구로, 각 시기마다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차지한 토지와 노비를 원래의 주인이나 양인 신분으로 되돌려주는 결정적 사례들을 남겼습니다. 다음은 연도별로 대표적 결정 및 사례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연도 주요 결정 및 사례
    1269년 김준 실각 후 임연·임유무 부자가 김준의 토지·노비를 몰수 목적으로 설치. 권력 교체 시 점탈 재산 처리
    1288년 충렬왕 집권기, 환관 최세연 등의 불법 토지 환수 시도, 권세가의 대토지 문제 개입
    1301년 권문세족 불법 토지 소유 적발·환수. 노비 문제 함께 개입. 소유관계 분쟁 판단
    1352년 공민왕 즉위 후, 권문세족이 점유한 토지·노비 환수(1차).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 불법 노비 양인 복귀 시도
    1366년 신돈 주도로 2차 전민변정도감 설치·강력 추진. 권세가 몰수 토지 대량 환수, 신돈 판사 임명. 양인 해방 사례 다수 기록
    1381년 우왕 7년, 권력 교체·토지 분쟁 심화로 추가 설치. 점탈된 토지 환수 작업 반복, 불법 노비 신분 회복 강화
    1388년 위화도회군 직전. 이성계 등 신흥 세력 성장, 왕권 재정비 명분으로 또다시 설치

    대표적 환수·해방 사례 요약

    • 권문세족이 무단 점유한 대토지 조사를 통해 원래 농민·지주의 소유권 회복 결정.
    •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양인 신분 회복, 노비안검법 부활 적용.
    • 왕권 혹은 개혁 정권 교체기마다, 실각한 세력의 대규모 재산·인적 자원 환수.

     

    전민변정도감은 특정 인물이나 계층(권문세족·환관 등)이 불법으로 차지한 토지와 노비 문제를 국가 주도로 환수, 해방한 점에서 사회 구조 개혁의 실효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신돈 집권기의 1366년 전민변정도감 사례가 가장 대표적으로, 실제 다수의 농민·양인 신분 회복과 권세가 몰수 토지 환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조선의 노비안검 등 민생 안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성장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은 단순한 제도 변화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정치 세력의 약진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신진사대부입니다. 신진사대부는 주로 지방 향리·중소 지주 출신으로, 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삼아 국가 개혁과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려는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제 통과를 통해 중앙 정치무대에 진입했고, 불교와 권문세족의 폐단을 비판하며 개혁의 중심 주체로 성장했습니다.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과 달리 능력과 학문을 중시했으며, 지방 사회에서 성장한 만큼 현실 정치와 민생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민왕 시기 이들은 개혁 정책을 지지하며 점차 중앙 정치에 진출했고, 이후 고려 말·조선 초의 핵심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들은 권문세족과 달리 능력ㆍ업적 중심의 관료 집단으로 평가받았으며, 성리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 질서를 구상하기에 적합한 집단이었습니다. 이 신진사대부가 주도적으로 성장한 결과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공민왕 개혁기의 사회 변화는 한국사에서 결정적 의미를 지닙니다.

     

     

    개혁의 한계와 역사적 의미

    공민왕의 개혁은 왕권 강화와 사회 구조 개편을 목표로 했지만, 권문세족의 민중 억압과 부패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신돈의 몰락 이후 전민변정도감은 유명무실해졌고, 개혁의 속도도 느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변화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정치·사회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비록 개혁은 권문세족의 저항 속에 무산되었지만, 신진사대부가 후일 조선의 성리학 관료 국가를 건설하는 초석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공민왕 개혁기의 역사는 각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

     

     

    결론

    공민왕의 개혁은 고려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대표합니다. 신돈이 개혁의 실무를 담당하며 권문세족의 기득권을 흔들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했습니다. 비록 개혁은 한계를 맞았지만, 이는 고려 역사 속에서 왕권 회복과 사회 구조 변화를 시도한 중요한 사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시기를 통해 개혁과 저항, 그리고 새로운 세력의 부상이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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