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 귀족인 양반과 일반 백성인 평민, 그리고 천민 등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습니다. 신분에 따라 이름 짓는 방식과 이름에 담긴 의미마저도 달랐습니다. 이런 이름은 단순한 호칭 그 이상으로, 계급 사회에서 개인의 신분, 가족의 명예, 사회적 관계 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양반과 평민 각각의 이름 짓기 특징과 실제 조선시대 일화까지 포함하여 조선시대 이름 문화의 이모저모를 살펴봅니다.
1. 양반의 이름 문화
1-1. 작명 방식과 구조
양반은 가문의 혈통과 조상, 지위의 상징성을 중시했습니다. 이들은 한자 이름을 사용했는데, 보통 두 글자의 이름을 썼습니다. 이름 외에도 항렬자(行列字)라 불리는 집안 내 대(代)별 돌림자를 넣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씨 가문에서 같은 항렬의 이름은 돌림자가 같아 “이○수, 이○훈”처럼 나타났습니다.
항렬자는 족보에 근거해 정해진 순서를 따라야 했고, 자손 간 서열을 바로 알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것은 가문의 질서와 전통을 유지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1-2. 자(字)와 호(號)의 사용
양반 계층은 이름(본명) 외에 ‘자(字, 20세 전후 성인이 되면 부여)’와 ‘호(號, 주로 학문이나 덕망 있는 이가 자주 사용)’를 붙여 불리기를 즐겼습니다. 예를 들어 퇴계 이황(李滉)의 경우, 본명은 이황이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였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친구나 후배, 제자에게 존칭으로 불리기에 적합했고, 공식문서에는 이름과 자, 혹은 이름과 호를 함께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1-3. 가족 및 사회적 의미
양반은 널리 쓰이는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부정적 의미가 담긴 글자는 사용하지 않는 등 작명 과정에서 길흉화복을 중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복(福)’, ‘수(壽)’, ‘영(永)’, ‘현(賢)’ 등 긍정적 의미를 가진 한자를 선호했습니다.
1-4. 양반 이름에 얽힌 일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일화가 유명합니다. 정약용은 본명이지만 ‘자’는 ‘미용(美用)’이었습니다. 사또가 되어 고을 행정을 맡으면서, 이름을 바꿔야 할지 고민했지만 조선의 관례에 따라 그냥 본명으로 불렸습니다. 그의 동생 정약전도 돌림자 ‘약(若)’이 들어간 점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조선왕조의 왕과 왕세자는 이름을 모두 피휘(避諱)하여, 그와 비슷한 한자도 백성들이 이름에 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컨대, 영조(英祖)의 이름 ‘금(昑)’을 감안해, 사회 전체가 ‘金’ 등 비슷한 자를 금기시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2. 평민의 이름 문화
2-1. 주로 한글 이름, 다양한 별명
평민은 공식적으로 한문을 배우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한글 이름이나 토속적 이름이 많았습니다. 두 글자, 혹은 세 글자의 한자 이름도 있었으나, 실제 생활에서는 별명, 집에서 부르는 이름(아명), 혹은 신체적 특징이나 태어난 순서를 반영한 이름이 많았습니다.
아이의 건강한 생존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돌쇠”, “복순이”, “갑순이”, “칠복이” 같은 이름이 흔했습니다. 이러한 이름에는 전통 신앙과 가족의 바람, 지역민의 인정이 깃들었습니다.
2-2. 다양한 별명과 나이 구분
어릴 때 부르는 이름(아명, 爲名)은 아이가 무사히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일부러 못생기거나 흔한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잡것’, ‘개똥이’처럼 일부러 낮은 의미를 부여해서 잡귀나 악귀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 기원한 것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본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을이나 공동체에선 주로 직업, 태어난 순서, 전통을 반영한 별명이 통용됐습니다.
2-3. 기록의 문제
평민의 한자 이름이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일은 드물었고, 중대한 법적 문서(예: 혼인, 사망, 세금)에 한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양반에 비해 평민 이름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2-4. 조선 평민 이름과 뒷이야기
조선 평민의 이름은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생활 기록’이었다.에는 실존 사료에 남은 구체적 이름과 일화를 중심으로 추가 사례를 정리한다.
* 화성성역의궤(1796)에 찍힌 노동자 이름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조하며 남긴 의궤에는 장인·일꾼 7만여 명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키 큰 석공은 박큰노미, 왜소한 목수는 김자근노미, 돌을 다루던 품군은 이돌쇠, ‘작은 사람’은 권작은노미, 쇠붙이 일꾼은 윤좀쇠로 표기되었다. 이름 끝의 ‘―노미·―쇠’가 신분과 직능을 한눈에 드러낸다.
* 호적에 찍힌 노비 이름 통계
경상도 대구부 호적만 살펴도 여비(女婢) 37,944명 가운데 최다 2,633명이 **조시(助是, ‘조이’)**였다. 이어 소사, 막랑, 강아지 등 실용적·동물적 어휘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남노(男奴) 쪽에는 돌진, 개덕처럼 ‘돌·개’ 계열과 막금, 막진 같은 ‘단산(斷産) 기원’ 이름이 두드러진다. 물건‧장소‧외모를 빌려온 호칭이 많아 ‘사람성(人性)’보다 ‘물성(物性)’이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 나이·달·출생 순서를 박은 이름
- 쉰 살쯤 되어 보인다고 김쉰동이
- 음력 10월에 태어난 박시월쇠
- 팔월생 김팔월쇠
- 큰 키는 최큰노미, 작은 키는 김작은복
모두 호적·의궤에 실재하는 이름이다. 정확한 생년월일을 몰랐던 마을 공동체가 달·나이·체격으로 즉석에서 붙인 호칭이 공식 기록으로 굳어졌다.
* “이제 그만 낳자” … ‘끝남·끝동’ 계열
1637년 별시(무과) 합격자 명단엔 김끝남, 정끝동, 안끝남 같은 이름이 대거 보인다. “마지막 아들로 여기겠다”는 부모의 바람을 담은 이름인데, 이들 가운데 김끝남은 36세에 과거에 급제해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 출산 마감을 선언한 이름이 관직 명부에 오른 흥미로운 사례다.
* ‘천한 이름이 장수 부른다’ 미신의 실제
왕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 고종의 아명(兒名) → 개똥이
- 명재상 황희의 아명 → 도야지
- 의기(義妓) 논개 역시 ‘개(戌)’가 네 기둥으로 겹친 사주라 하여 ‘논개’라 지었다는 설이 전한다.
천한 이름으로 아이를 숨겨 귀신의 시기를 피하겠다는 천명위복(賤名爲福) 관념이 평민·왕족을 가리지 않고 퍼져 있었다.
* ‘돌·쇠’ 계열: 강인함과 생명력의 상징
‘쇠(金)·돌(石)’ 한 글자는 단단함·장수를 기원했다. 안길돌, 서귀돌, 이돌쇠 같이 ‘돌’이 들어간 이름과 박볼돌, 윤좀쇠 같은 ‘쇠’ 이름이 화성성역 참여 인부 명부에 무수히 찍혀 있다. ‘쇠=금’이라는 등가관념 덕에 돈과 복을 끌어온다는 속신도 함께 작동했다.
* 외모·특징을 별명으로
도시 호적과 노비 문서에는
- 눈이 튀어나온 이부엉이
- 마른 체형 신지팽
- 뚱뚱한 박뭉투리
처럼 외모를 바로 호명한 기록이 즐비하다. 현대 감각으로는 조롱처럼 들리지만, 당시엔 개인의 고유 식별자로 자연스럽게 수용됐다.
기록에 남은 평민 이름은 ‘가난·노동·소망’을 압축한 짧은 언어 예술이었다. 키와 달, 돌과 쇠, 개똥까지 생활 세계가 곧 이름 사전이었기에,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평민 이름 한 줄은 조선 서민의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전해 준다.
3. 양반과 평민 이름의 비교
문자 | 한문, 한글 거의 없음 | 한글 이름, 토속적·특징적 이름 |
명명 구조 | 항렬자 사용, 자·호 부여 | 아명, 별명 활용, 신체·순서 반영 이름 |
사회 기능 | 가문, 혈통 상징, 관직/공적 기록에 사용 | 가족·공동체 호칭, 생존과 무사 기원 |
기록성 | 족보 등 공식문서 다수 존재 | 공식 기록 드물고, 구전으로 전해짐 |
대표 예시 | ‘이황(李滉)’, ‘김홍도(金弘道)’, ‘정약용(丁若鏞)’ | ‘돌쇠’, ‘복순이’, ‘칠복이’, ‘개똥이’ 등 |
4. 시대를 비추는 이름의 힘
조선시대 이름은 신분제 사회의 구조를 반영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소중한 족적이었습니다. 양반의 격식 있는 이름에는 가문의 명예와 체계, 평민의 이름에는 치열한 생존과 가족의 기원이 녹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통 돌림자나 가족 내 별명,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진심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의 이름 문화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