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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최고의 외교적 승리 :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담판, 강동 6주 확보

이모는오늘도 2025. 9. 16. 16:49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서희의 담판, 그리고 강동 6주 확보는 한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외교적 승리로 기록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요나라)의 대규모 침입 위기를 오직 외교적 협상으로 해결하면서, 오히려 영토를 확장한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외교 전략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담판, 강동 6주 확보 : 한국사 최고의 외교적 승리 / 강동6주의 위치 :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거란 침입의 시대적 배경과 국제정세

10세기 말 동북아시아는 거란(요나라), 송나라, 고려가 삼각 균형을 이루며 복잡한 국제정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 거란 전쟁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916년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건국한 후,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키며 북방의 패권을 장악했다. 특히 986년 송나라가 거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거란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거란은 991년 압록강 유역에 위구, 진화, 내원 등의 성을 쌓으며 고려 거란 침입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당시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거란을 견제하려 했고, 이는 거란에게 전략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942년 고려 태조가 거란 사신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 이후 양국 관계는 50년간 단절상태였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과 고려의 위기

993년 10월,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이끄는 대군이 고려 거란 침입의 서막을 열었다. 거란군은 봉산군을 점령하고 고려군 선봉장 윤서안을 사로잡으며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고려 조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신하들 사이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부터 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할지론이 대세를 이뤘다.

 

이때 서희만이 홀로 항전을 주장했다. 송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던 서희는 당시 국제 정세에 밝았고, 거란의 진정한 의도가 고려 정복이 아닌 송나라와의 관계 차단에 있음을 간파했다. 서희는 성종에게 "거란이 송과의 전쟁이 중요한 상황에서 고려와 큰 규모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외교적 해결을 설득했다.

 

 

서희의 담판 : 외교 협상의 교과서

서희의 담판은 한국 외교사상 가장 완벽한 협상 사례로 평가된다. 서희가 거란군 진영으로 향했을 때, 소손녕은 그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서희는 "뜰에서 절하는 것은 신하가 군주에게 인사하는 예법이오. 두 나라의 신하가 만나 인사하는 예법은 아니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는 협상에서 대등한 지위를 확보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라며 영토 할양을 요구하자, 서희는 논리적이고 치밀한 반박을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고, 만약 영토의 경계를 따진다면 거란의 동경이야말로 본래 우리의 땅"이라는 명분론을 펼쳤다.

 

더 나아가 서희는 현실적 논리도 구사했다. "고려에서 거란에 사신을 보내려 해도 압록강 사이에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어 통교가 어렵다"며, 거란이 여진족을 축출하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를 차지한다면 양국 간 원활한 교류가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강동 6주 확보의 성과와 의미

서희의 담판 결과 소손녕은 고려가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과 통교하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 280리"의 영토권을 인정하는 화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고려는 무력 충돌 없이 강동 6주(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지역을 확보할 명분을 얻었다.

 

994년부터 996년까지 고려는 여진족을 축출하고 이 지역에 성을 쌓아 실질적 통치권을 확립했다. 강동 6주는 현재의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일부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압록강을 자연 경계선으로 하는 고려의 북방 국경선을 확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강동 6주 확보의 군사적 의미는 이후 거란의 2차(1010년), 3차(1018년) 침입에서 입증되었다. 특히 1018년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거란군을 대파할 수 있었던 것은 강동 6주 중 하나인 귀주가 전진 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북방과 교류하고 이들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중요한 전진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외교적 승리의 역사적 교훈

서희의 외교 담판강동 6주 확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여러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 계승자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민족 정체성 확립의 의미가 있다. 둘째, 무력 충돌 없이 논리와 명분을 통해 실익을 얻은 외교 전략의 모범 사례다. 셋째, 상대방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상호 이익을 창출하는 '윈-윈' 협상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된다. 서희는 거란의 목적이 고려 정복이 아닌 송나라와의 관계 차단임을 간파하고, 이를 역으로 활용해 영토 확장이라는 실익을 얻어냈다.

 

 

 

서희의 담판을 통한 강동 6주 확보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손자병법의 지혜와 "명분과 실리의 조화"라는 외교 전략이 만들어낸 완벽한 승리였다. 이 사건은 현대 한국 외교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는 역사적 자산으로, 앞으로도 계속 연구되고 기억될 가치가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강동 6주 주요 연대표

  •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요나라) 제1차 침입, 서희 담판으로 강동 6주 영토권 확보.
  • 994~996년: 고려가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에 성을 축조해 강동 6주 실질 지배 확립.
  • 1010년(현종 1년): 거란 제2차 침입, 강동 6주 반환 요구, 양규의 활약으로 고려 방어 성공.
  • 1018년(현종 9년): 거란 제3차 침입, 귀주대첩(강감찬)의 승리로 강동 6주와 북방 영토 방어 확실히 다짐.

강동 6주 지도 정보

강동 6주는 압록강 동쪽 280리, 청천강 북방, 현재 북한 평안북도 및 함경남도 일부와 연관된다.
여섯 주는 각각 흥화진(백마산성, 의주), 용주(용천), 철주(철산), 통주(선천), 곽주(곽산), 귀주(구성)로 추정된다.

  • 흥화진(의주)
  • 용주(용천)
  • 철주(철산)
  • 통주(선천)
  • 곽주(곽산)
  • 귀주(구성)

 

 

**서희의 외교 전략과 담판 대화 전문 원문

고려사 원문에 기록된 서희와 소손녕 담판 대화 전문

서희의 담판은 『고려사』 권94 「서희전」과 『고려사절요』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 외교사상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다.

 

의전 싸움과 대등한 외교의 시작

소손녕: "내가 큰 나라의 높은 사람이니, 〈네가〉 마땅히 뜰에서 절해야 한다."

서희: "신하가 임금에게 절을 올리는 것은 예의지만, 두 나라의 신하가 서로 만나는데 어찌 이처럼 할 수 있겠소?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이 의전 분쟁에서 소손녕이 계속 고집하자, 서희는 관사로 돌아가 누워버렸다. 결국 소손녋이 대등한 예를 행하자고 허락했다.

 

본격적인 담판 대화 전문

소손녕의 첫 번째 주장: "너희 나라는 신라(新羅)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범해 왔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朝聘)에 힘쓴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서희의 반박: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요(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해 왔다고 말하는가?"

 

외교 교섭의 핵심 논리

서희의 현실적 제안: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통교를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구체적으로 서희는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이라며, 고려가 이 지역의 여진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거란과의 교통로를 개척하겠다고 제안했다.

 

협상 결과와 합의 내용

소손녕은 서희의 논리에 설득되어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합의했다

  1. 고려 왕이 친히 거란에 조회할 것
  2. 거란의 연호를 사용할 것
  3.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의 고려 영유권 인정

 

 

서희 외교 전략의 핵심 요소

서희의 외교 전략은 다음 세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되었다

1. 상황 판단과 정보 분석

서희는 거란의 진정한 목적이 고려 정복이 아닌 송나라와의 관계 차단임을 정확히 간파했다.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도 봉산군에서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협상을 제의한 것을 보고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판단했다.

2. 명분과 실리의 조화

고구려 계승 정통성 주장(명분)과 압록강 동쪽 영토 확보(실리)를 동시에 달성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지피지기의 관찰로 명분과 실리의 거래를 성사시킨 것"이다.

3. 윈-윈(Win-Win) 협상 기법

거란에게는 송나라와의 관계 단절이라는 외교적 성과를, 고려에게는 영토 확장이라는 실익을 제공하는 상호 이익 창출 방식을 활용했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서희의 담판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영토문제를 문서로 확인한 사건이며, 고구려의 역사를 고려가 계승했다는 것을 확인한 국제적인 협약"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승리를 넘어 민족 정체성 확립과 영토 주권 수호를 동시에 달성한 역사적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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