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가장 뛰어난 외교 담판으로 평가받는 서희의 강동6주 획득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외교적 성과 중 하나입니다. 942년 이천에서 태어난 서희는 단순한 문신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바꾼 전략가였습니다.
서희의 생애와 배경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경기도 이천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광종 대의 명신 서필(徐弼)이었으며, 할아버지 서신일(徐神逸)부터 이천 지역의 토착 호족 가문이었습니다.
출생과 가문 : 이천 서씨를 빛낸 소년
- 출생 연도·장소: 942년(태조 25), 경기도 이천
- 본관·자(字): 이천 서씨, 자는 염윤(廉允)
- 가계: 아버지 서필(徐弼)은 광종 때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명신, 조부 서신일(徐神逸) 역시 이천 토착 호족 출신
‘사슴의 은혜’ 설화
어린 서희에게는 가문의 덕을 예고한 ‘사슴 전설’이 전한다. 조부 서신일이 화살에 맞은 사슴을 살려주자 꿈에 신인이 나타나 “그대 후손은 대대로 재상을 지낼 것이오”라고 축복했다는 일화다. 실제로 서희 자신의 재상 등용은 물론, 장남 서눌·손녀 원목왕후까지 나라의 핵심 인물이 되며 설화의 예언이 실현된다.
젊은 시절과 과거 급제
18세, 갑과(甲科) 합격
960년(광종 11) 불과 18세에 과거 갑과로 급제한 서희는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 요직을 빠르게 두루 거쳤다. 광종이 추진한 과거제 강화 정책의 ‘최고 수혜자’였던 셈이다.
광종의 총애와 청렴 일화
광종이 서경(평양) 영명사에서 연회를 즐기려 하자 서희는 “국고(國庫)가 넉넉지 않은데 사치하시려 합니까?”라며 직언(直言)해 행사를 중지시켰다. 광종은 오히려 그의 충정을 높이 사 칭찬과 말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송(宋) 사신으로 첫 외교 무대 진출
972년, 송나라와 10여 년간 끊겼던 외교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정사(正使)**로 파견된 서희는 예법을 완벽히 지켜 송 태조의 신뢰를 얻었다. 태조는 검교병부상서 직함과 내봉경(內奉卿)을 내려 그의 기개를 치하했다. 이 경험은 훗날 거란 담판에서 발휘될 국제 감각의 자양분이 된다.
960년 18세의 나이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서희는 광평원외랑, 내의시랑 등을 거쳐 관직에 나아갔습니다. 972년에는 송나라에 정사로 파견되어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고려-송 외교관계를 복원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때 송 태조는 서희의 품격에 감탄하여 검교병부상서라는 정3품 관직을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993년 거란 침입과 위기상황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당시 동북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한 거란의 침입에 고려 조정은 크게 동요했습니다. 신하들 사이에서는 서경(평양) 이북을 할양하고 화해하자는 할지론까지 제기되었으며, 성종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서희만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국제정세에 밝았던 서희는 거란의 진짜 목적이 고려 점령이 아니라 송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후방인 고려를 중립화시키려는 것임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 전략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뛰어난 협상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먼저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의 옛 땅인데 고구려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평양에 도읍했으므로 오히려 거란이 고려에게 땅을 내놓아야 한다"고 당당히 맞받았습니다.
소손녕이 "고려는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어째서 바다 건너 송나라와만 교류하느냐"며 본색을 드러내자, 서희는 핵심을 찔렀습니다. **"고려와 거란 양국의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며, 여진족을 축출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성을 쌓으면 거란과 국교를 통하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강동6주 획득의 성과
서희의 담판 결과, 고려는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고 송나라와의 통교를 끊는 대신 '안북부에서 압록강까지 280리'의 영토 점유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994년부터 이 지역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6주를 설치했습니다.
강동6주는 흥화진(백마산성), 용주(용천), 철주(철산), 통주(선천), 곽주(곽산), 귀주(구성) 등 6개 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현재의 평안북도 서쪽 지역으로,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희 외교의 역사적 의의
서희의 외교 담판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습니다. 첫째, 무력 충돌 없이 외교적 협상만으로 영토를 확장한 전무후무한 사례입니다. 둘째, 이후 거란의 2차, 3차 침입 시 강동6주가 고려의 든든한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019년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거란군을 크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서희가 구축한 강동6주 방어체계 덕분이었습니다.
셋째, 서희는 **'명분과 실리의 거래'**를 통해 최적의 협상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거란과의 사대관계라는 명분을 주는 대신 강동6주라는 실질적 영토 이익을 확보한 것입니다. 넷째, 고구려 계승 의식을 명확히 표명하여 고려의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 서희의 협상력
서희의 협상 전략은 현대에도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그는 상대방의 진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강직한 태도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후 논리적 설득을 통해 협상을 이끌어갔습니다.
서희의 4단계 협상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
①상대방 의도 파악 ②기선 제압을 통한 주도권 확보 ③논리적 근거 제시 ④상호 이익이 되는 해결책 제안. 이러한 전략은 현대 외교와 비즈니스 협상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접근법입니다.
서희는 998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외교적 업적과 협상 전략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외교사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2009년 외교통상부가 선정한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첫 번째 인물로 서희가 선정된 것은 그의 외교적 성취가 현재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25.09.16 - [한국, 모든 것의 역사] - 한국사 최고의 외교적 승리 :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담판, 강동 6주 확보
한국사 최고의 외교적 승리 :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담판, 강동 6주 확보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담판, 그리고 강동 6주 확보는 한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외교적 승리로 기록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요나라)의 대규모 침입 위기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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