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모든 것의 역사

고려의 수도 개경(송도)과 벽란도, 국제 무역항과 아라비아 상인

이모는오늘도 2025. 10. 11. 22:39

 

목차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 송도)은 오늘날의 개성에 해당하며, 동아시아 중세 시기에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한 도시였다. 특히 개경 인근의 벽란도(碧瀾渡)는 고려를 대표하는 국제 무역항으로, 송(宋), 일본, 여진뿐 아니라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드는 세계적 무역 교류의 장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해상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로서, 고려의 선진적인 개방성과 경제력을 보여주는 핵심 거점이었다.

     

    고려의 수도 개경(송도)과 벽란도, 국제 무역항과 아라비아 상인 / 벽란도 가는 길 : 이미지 출처 국가유산청

     

     

    고려의 수도 개경(송도)의 국제적 위상

    개경은 정치·행정의 중심지이자 무역과 문화의 교류가 활발했던 국제 도시였다. 고려는 918년 태조 왕건이 건국한 이후, 수도를 개경에 두면서 ‘개경 중심의 해상 교역체계’를 구축했다. 개경 인근의 벽란도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나루'라는 뜻처럼, 예성강 하구의 깊은 물길과 접근성이 뛰어난 지리적 장점으로 대형 선박들의 드나듦이 자유로웠다. 한강 하류의 교통 이점과 서해를 통해 중국 송나라로 연결되는 해상 루트를 활용하여, 개경은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개경에는 국내외 상인들이 모여 각종 물자를 거래했고, 다양한 나라의 화폐가 유통될 정도로 경제활동이 활발했다. 개경 시내에는 상설시장과 외국인 거주지가 형성돼 각국의 언어와 물건이 오가는 다국적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이러한 활발한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는 중앙과 지방, 그리고 해외를 잇는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벽란도, 고려를 대표한 국제 무역항

    개경 남쪽 대동강 하류에 위치한 벽란도는 고려시대 최대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송도와 가까운 위치 덕분에 내륙 수도와 해상 교역이 직접 연결될 수 있었으며, 서해를 통해 중국 산둥 반도 방향으로 이어지는 무역 항로의 출발점이었다. 고려 시대 벽란도에는 중국의 송, 일본, 여진, 그리고 먼 아라비아 상인들의 선박까지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이라는 관사가 설치되어 외국 사신들의 접대장소와 이름 유래가 되었고, 국제 상업 중심지로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대표적으로 『고려사』에는 “벽란도에는 송상(宋商)과 대식국상(大食國商, 즉 아라비아 상인)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벽란도에서는 비단, 향료, 약재, 유리제품, 산호, 은화 등 고급 수입품이 활발히 유통되었고, 고려의 수출품으로는 인삼, 금, 은, 인견, 자기 등이 인기를 끌었다. 벽란도 항구는 고려의 부를 상징하는 공간이자, 동서 교역의 주요 거점이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이곳 벽란도를 통해 수은과 향료 같은 특산품을 팔고, 금과 비단 등 고려의 특산품을 매입해갔다. 다양한 상인과 화폐, 물산이 모이는 개방적 교역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이 덕분에 '코리아(Korea)'라는 국호가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긍의 「고려도경」,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등 고문헌에는 벽란도의 번성상과 국제무역의 위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라비아 상인과 고려의 만남

    벽란도를 통해 입국한 아라비아 상인들은 '대식국인(大食國人)'으로 불렸다. 이들은 실크로드 해상 루트를 따라 인도양을 건너 중국 동남부 항구를 거쳐 한반도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향료, 보석, 유리제품 등 당시 극동 지역에서 보기 힘든 고급 물품을 거래하여 고려 왕실과 귀족들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의 국제적 개방성이 이러한 해외 상인들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고려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국가이지만 동시에 불교적 관용과 실용적인 외교정책을 유지하여, 외국 상인들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통상 환경을 제공했다. 이는 송나라, 일본, 동남아, 아라비아 상인들이 모두 모여드는 국제항 벽란도의 성장 요인이 되었다.

     

     

    벽란도의 쇠퇴와 역사적 의의

    벽란도의 전성기는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였다. 그러나 몽골 침입과 함께 고려의 대외무역이 위축되면서 점차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벽란도는 조선시대 한양 천도, 해금(海禁)과 쇄국정책, 그리고 근대 이후 철도 중심 교통체계 변화 등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벽란도는 한반도의 해상 실크로드, 동서 교역의 징검다리로서 빛났던 시절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벽란도는 한국 해상 무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벽란도의 존재는 고려가 ‘폐쇄국’이 아니라, 오히려 국제 무역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개방형 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벽란도에서 활동한 아라비아 상인들은 한국 역사에서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서아시아 상인으로, 동서 문명 교류의 상징적 존재로 평가된다.

     

     

    오늘날의 시사점

    현재 개성과 벽란도는 남북 분단으로 접근이 제한되어 있지만, 그 역사적 가치는 여전히 높게 평가된다. 학계에서는 개경 일대의 유적과 벽란도 항만 터를 통해 고려 시대 해상 네트워크의 구조를 복원하고 있다. 더불어 벽란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국제 무역 시스템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글로벌 무역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개경과 벽란도의 사례는 “고려가 세계를 향해 열린 해양 왕국이었다”는 역사적 자부심을 일깨워 준다. 아라비아 상인과 송나라 상인들이 오갔던 그 항구는 단순한 상업 공간을 넘어, 문화와 기술,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진 국제 문명 허브였던 것이다. 과거 개경과 벽란도가 세계의 중심에서 활약했던 만큼, 오늘날 한국이 세계 무역과 문화의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근원은 이미 천여 년 전 고려의 개방정신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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