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1910~1945년)는 조선인들에게 극심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어려움이 닥친 시기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 연해주, 하와이 등지로 해외 이주를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생존을 위해 새로운 땅을 찾았으나, 각지에서 강인한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며 한국 현대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해외 이주 이유와 이주 후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 지역별 민족 공동체와 그 문화적 유산을 종합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해외 이주 이유
조선인들이 해외로 이주하게 된 원인은 다층적이었습니다. 우선, 19세기 말부터 자연재해와 가난, 토지의 부족 등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했습니다. 수차례의 흉년과 가혹한 세금 압박으로 농민들이 생존 위협을 받자, 상대적으로 농업에 적합하고 황무지가 넓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와 강압적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와 안전을 찾기 위한 의도도 컸습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만주국 건설과 만주 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장려하였고, 조선총독부 역시 농촌 인구 과잉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이주를 촉진했습니다. 하와이로의 이주 역시 경제적 동기와 함께 가족 결합을 위한 사진 신부 제도 등 사회적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이렇게 복합적인 이유로 조선인들의 해외 이주는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해외 이주 후 조선인들의 사회적·문화적 변화
해외 이주 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농업 중심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도, 학교와 교회, 한인 자치 단체를 세워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을 적극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한국 전통 문화를 유지하며,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주민들은 현지에서 빈곤과 노동 착취, 인종 차별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하와이의 경우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장시간 저임금 노동과 차별이 심했으며, 만주와 연해주 조선인들도 일본과 현지 세력의 탄압에 맞서 불안정한 삶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가족 결합 및 안정된 공동체 형성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과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이는 각지 한인 사회의 성장과 문화 유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지역별 조선인 민족 공동체와 문화 유산
만주 지역 : 이주와 농업 개척,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만주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대표적인 이주 지역으로, 1910년대부터 대규모르 이주가 시작되어 황무지 개간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만주국을 세우고 조선인의 집단 이주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일본의 만주 개발과 국방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농촌 인구 과잉과 경제난 해소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조선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백의의 전통 의상을 입고 한자 서당과 학교를 세워 전통 문화를 계승하며 민족 교육을 활성화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만주 이주를 강압적으로 추진했고, 현지에서 일본인과의 충돌, 일제군대 동원 문제 등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만주는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이 결집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습니다. 일제의 만주국 건국과 강제 이주 정책에도 불구하고 만주 한인 사회는 강한 결속력과 ‘개척자’ 정신으로 민족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연해주 지역 : 독립운동과 자치사회 형성
연해주(러시아 극동 지역)로의 조선인 이주는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독립운동을 위한 전진기지로 급부상했습니다. 연해주는 자치적 한인 사회가 일찍이 형성되어 정치적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지신허’ 등 한인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동휘, 홍범도 등의 독립운동 지도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연해주의 한인 사회는 농업을 중심으로 자생력을 키웠으며, 연해주에서 논농사를 처음 도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와 30년대에 일본군의 탄압과 1920년 신한촌 학살(4월 참변) 등 참혹한 상황도 겪었습니다. 조선어 사용과 한인 자치 행정으로 자립 기반을 닦았으나, 스탈린의 강제 이주 등 정치적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문화와 전통은 고려인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하와이 지역 : 사탕수수 농장 노동과 사진 신부
하와이로의 조선인 이주는 1903년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주로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조선에서 온 20~30대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한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였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하고 67센트의 낮은 임금을 받는 등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대부분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와이 조선인들은 사탕수수 농장 등의 노동에서 극심한 착취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이주 후 가족을 이루기 위해 사진 신부 제도를 통해 원거리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사진만 보고 결혼하는 것은 당시 매우 희망적이면서도 힘든 결정이었지만, 이후 한인 사회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와 한인 학교를 중심으로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하와이는 다민족 사회로서 다양한 문화가 융합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현재 하와이 한인사회는 그들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해외 이주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
일본의 강압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해외 이주는 필연적이었으나, 그들의 삶은 항상 고난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일제의 탄압과 내부 갈등,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독립군 조직과 민족 교육이 이어졌습니다. 하와이에서는 노동 착취와 인종 차별에도 불구하고 지역 한인 사회가 단단하게 결속되어 민족 정체성을 지켜냈습니다.
또한 이들의 경험은 전 세계 재외동포 사회의 뿌리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민족 정체성과 역사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해외 이주 조선인의 삶과 독립운동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있어 매우 소중한 자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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