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삼국시대(기원전 1세기~7세기) : 자유로운 연애와 다양한 혼인 풍습
삼국시대는 각 나라별로 혼인 제도와 연애 풍속이 현재와는 사뭇 달랐던 시기입니다. 고구려는 ‘서옥제’라는 데릴사위 제도를 통해 신랑이 신부 집에서 오래 머무는 혼인 방식이 성행했고, 이는 여성의 가족 및 경제권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신라 역시 혈족혼과 인척혼이 혼재했으며,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자유연애의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특히 평강공주와 온달 이야기와 같이 시대를 뛰어넘는 자유연애 일화들이 전해지며, 삼국시대에는 연애와 결혼이 어느 정도 감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평균 결혼 연령: 남성 18-20세, 여성 16-18세
주요 혼인 제도와 특징:
- 고구려: 서옥제(데릴사위제) - 신랑이 신부 집에서 거주
- 옥저: 민며느리제 - 10세경 약혼 후 성인이 되면 정식 혼인
- 신라: 골품제에 따른 신분내혼, 비교적 자유로운 남녀 교제
역사적 일화:
- 평강공주와 온달 (고구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가 16세에 미천한 신분의 온달과 자유연애 결혼을 강행. 아버지가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라"고 한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궁을 나와 온달과 결혼함
- 김춘추와 문희(아지): 신라 진골 출신 김춘추가 김유신의 누이 문희와 연애 후 혼전임신. 선덕여왕의 중재로 정식 혼인하여 후에 문무왕을 낳음
- 김유신과 천관녀: 화랑 김유신이 천관녀와 사랑에 빠졌으나 어머니 만명부인의 반대로 이별. 김유신이 천관녀 집에 가는 말의 목을 베어 의지를 보임
- 설씨녀와 가실: 신라 진평왕 때 설씨녀가 6년간 전쟁에 나간 연인을 기다린 끝에 결혼한 순애보담 이야기
2. 고려시대(918~1392) : 처가살이와 국제 결혼, 그리고 일화 속 사랑 이야기
고려시대는 삼국시대보다 더 엄격한 신분제와 가족 중심의 결혼 풍습이 자리 잡았던 시기입니다. ‘남귀여가혼’이 일반화되며 신랑이 처가에서 오래 머무는 문화가 확산되었습니다. 결혼 연령은 남성 20세 후반, 여성 16세 초반으로, 조혼 사례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린 나이 결혼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불교와 함께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만큼, 국제 결혼과 원나라와의 혼인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또, 유명한 일화로 곽여가의 72세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이야기와, 13-16세 처녀들이 원나라 궁녀로 끌려가며 조혼이 심화된 사례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는 결혼과 삶에 대한 시대적 가치관의 변화와 혼인 연령 변동을 보여줍니다.
평균 결혼 연령: 남성 20.7세, 여성 16.3세
주요 혼인 제도와 특징:
- 남귀여가혼(서류부가혼): 신랑이 처가에서 장기간 거주
- 근친혼과 동성혼: 초기에는 허용, 점차 금지 확대
- 공녀제도로 인한 조혼: 원 간섭기(1270~1356) 때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조혼 풍습 확산
역사적 일화:
- 곽여의 독신생활: 예종 때 관리 곽여가 72세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며 학문과 예술에 전념. 불교적 가치관으로 혼인하지 않았으나 기생과 첩은 두어 논란
- 공녀제도의 비극: 13-16세 처녀들이 원나라 궁녀로 차출되어 50여 차례에 걸쳐 수천 명이 끌려감. 이를 피하기 위해 10세 전후의 조혼이 성행
- 왕족 여성의 만혼: 숙종의 외손녀 왕재의 딸이 43세에 미혼으로 병사, 인종의 외손녀 왕영의 딸이 36세에 미혼으로 병사하는 등 적절한 배우자를 찾지 못한 사례들
3. 조선시대(1392~1897) : 유교적 질서와 엄격한 혼인 규범
조선시대는 유교사상에 기반한 엄격한 혼인 규범이 확립된 시기입니다. 『주자가례』의 영향을 받아 육례 절차(의혼, 납채, 납폐, 친영)가 정형화 되었으며, 결혼 연령도 법적으로 남자 15세, 여자 14세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는 조혼 풍습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음을 의미하며, 정절과 순애를 강요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또한, 가문 간 결합, 부모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는 중매혼이 일반적이었으며, 특히 양반사회의 경우 엄격한 신분 질서 속에서 결혼이 가족과 가문을 연합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정절을 지킨 여성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수절문화와 엄격한 가부장제의 그림자가 흔히 언급됩니다.
평균 결혼 연령:
- 16-17세기: 남성 17.31세, 여성 17.75세
- 19세기: 남성 15.68세, 여성 17.15세
- 법적 혼인 가능 연령: 남성 15세, 여성 14세
주요 혼인 제도와 특징:
- 유교적 질서: 『주자가례』에 따른 육례 절차
- 조혼과 중매혼: 가문 간 결합, 부모 주도의 혼인
- 정절 이데올로기: 열녀 표창과 여성의 수절 강조
역사적 일화:
- 세종의 혼인 연령 규정: 1427년(세종 9) 여성 14-20세 혼인 규정, 1440년(세종 22) 남성 16세, 여성 14세로 하향 조정, 부모 50세 이상 시 12세 이상 조혼 허용
- 꼬마 신랑 풍속: 11-14세 남아가 6-10세 연상의 여성과 혼인하는 사례들이 존재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음
- 열녀들의 이야기: 임진왜란 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신한 수많은 여성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76명의 조선 열녀 수록
4. 근대(1897~1945) : 서구 문화와 개인주의적 결혼 문화의 도입
근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결혼 풍속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법적 결혼 연령은 남성 20세, 여성 16세로 정착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남성 17세, 여성 15세로 낮아지고, 서구식 연애문화가 유입됩니다. 1920년대부터 신여성 운동과 교육의 확산으로, 연애와 결혼은 더 이상 가문과 부모의 결정이 아닌 개인의 선택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자유연애가 점차 정착됩니다. 이때부터 결혼식도 전통과 현대가 혼합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결혼 연령도 점차 높아집니다. 예를 들어, 1925년에는 남성 25~27세, 여성 16.7세로 나타났고, 이후 출산과 경제적 독립, 여성 지위 향상에 힘입어 결혼 적령기는 점차 늦어졌습니다.
평균 결혼 연령:
- 1925년: 남성 25-27세, 여성 16.7세
- 1940년: 여성 17.5세
주요 혼인 제도와 특징:
- 갑오개혁(1894): 남성 20세, 여성 16세 혼인 연령 규정
- 일제강점기 조선민사령(1912): 남성 17세, 여성 15세
- 서구식 연애관 유입: 자유연애에 대한 동경 확산
역사적 일화:
- 신여성의 등장: 1920년대 교육받은 신여성들이 연애결혼과 중매결혼의 절충론 제기, 25세 이상을 결혼 적정기로 권장
- 조혼 비판 운동: 1886년 『한성주보』에서 조혼을 폐습으로 규정, 근대 계몽운동가들의 조혼 타파 운동
5. 현대(1945~현재) :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 만혼과 비혼 현상
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결혼 문화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서구의 결혼 방식과 가치관이 도입되고, 1980년대부터는 개인 중심의 결혼 문화가 확산됩니다. 2023년 통계에 따르면 평균 결혼 연령은 남성 34세, 여성 31.5세로 높아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비혼’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결혼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자유 선택으로 변화했고, 결혼식 역시 전통 혼례, 서구식 웨딩 등 다양한 형식으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경제적 독립이 결혼 시기를 늦추는 주요 이유로 작용하며, 저출산 현상과 함께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평균 결혼 연령:
- 1990년: 남성 27.8세, 여성 24.8세
- 2023년: 남성 34.0세, 여성 31.5세
주요 혼인 제도와 특징:
- 연애결혼의 대중화: 개인의 선택권 중시
- 만혼 추세: 경제적 안정과 개인 성취 우선
- 결혼관의 다양화: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인식
현대적 변화:
- 여성 지위 향상: 경제적 독립과 사회 진출 확대
- 결혼식 문화: 전통혼례와 서구식 예식의 융합
- 저출산과 비혼: 52%가 결혼을 필수가 아니라고 응답
핵심 변화 흐름
연령 변화: 삼국~고려시대 16-20세 → 조선시대 15-18세 → 근대 20세 전후 → 현대 30세 이상
결혼 주도권: 삼국시대 개인+가족 → 고려시대 가족 중심 → 조선시대 부모 절대권 → 현대 개인 중심
사회적 의미: 가문 연합 → 신분 유지 → 유교적 질서 → 개인의 선택과 행복
각 시대마다 사회적 가치관과 제도의 변화가 연애와 결혼 연령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현대로 올수록 개인의 자율성과 경제적 안정이 결혼 시기 결정의 주요 요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재미로 보는 각 시대별 연애에 관한 사례들
삼국시대의 연애 일화
- 강수와 야장의 딸
태종무열왕 때 문장가 강수는 부모가 혼인을 주선하려 하자, 스스로 사귄 야장의 딸과 결합을 선택했다. 강수가 20세가 되자 이전 연인인 그 여성과 결혼식을 치르고 부부 관계를 유지했으나, 사회적 인정은 받지 못해 그의 부모는 계속 반대했다. - 김현과 탑돌이 처녀
신라 원성왕 때 관리 김현은 흥륜사 전탑을 돌며 만난 처녀와 눈이 맞아 탑돌이를 마친 직후 사랑을 나누었다. 처녀는 그를 “천첩보다 나은 인연”이라 칭하며 일시적 사랑을 인정했지만, 정식 혼인은 아니었다. - 서동과 선화공주(『서동요』 설화)
백제 무왕 설화에 따르면, 귀양 가던 선화공주는 우연히 만난 서동에게 이끌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동행했다. 이후 서동의 정체를 알고는 백제로 그를 따라가 사랑을 이루었다. - 주몽과 유화부인
『삼국지』와 『삼국사기』에서 주몽(고구려 건국 시조)과 유화부인은 중매 없이 서로의 뜻으로 결합했다. 주몽이 유화를 떠나 친정에 남은 상태에서 유화가 홀로 아들을 낳아 키웠고, 아들이 성장한 뒤에야 함께 고구려로 돌아왔다. - 김춘추와 아지(문희)
신라 김춘추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자유혼 설화에서, 선덕여왕의 중재로 정식 혼인 전 이미 연애와 혼전임신을 한 아지와 결합하였다. 이 일화는 상류사회의 연애혼 흔적으로 평가된다.
고려시대의 연애 사례
-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고려 건국 초 태조 왕건은 장화왕후 오씨와 자유분방하게 만나다가 공식 중매 절차 없이 결혼 연합을 이뤘다. 이 사례는 신라 말·고려 초 연애혼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 충렬왕 때 허공과 담장 넘은 처녀
충렬왕 시대 관리 허공은 달밤에 거문고를 타던 중, 이웃집 처녀가 담장을 넘어 와 함께 밤을 보냈다. 여성은 예의에 어긋난 짓을 깨닫고 돌아갔으나, 이는 연애 사건이 법적 문제로는 이어지지 않는 자유로운 만남이었다. - 고려가요 속 남녀상열지사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에 수록된 고려 속요들은 남녀 간의 진솔한 사랑을 노래한다. 이들 노래에는 향도회·연등회·팔관회 같은 축제 때 남녀가 어울려 사랑을 키우던 풍경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의 연애 일화
- 유희춘과 송덕봉(『미암일기』)
조선 중종 31년(1536)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는 남편이 11년간 기록한 일기를 통해, 생생한 연애 일상을 남겼다. 편지와 시문으로 애정을 주고받으며, 경직된 유교 사회 속에서도 깊은 상호 존중과 유머를 나눴다. - 하립과 삼의당 김씨
영조 45년(1769) 남원 출신 하립과 약혼자 삼의당 김씨는 어릴 적 친구로 자랐다. 18세 때 혼례를 올린 뒤 첫날밤 시문을 주고받으며 연인을 확인했고, 그 시들은 수많은 문집에 전해졌다. - 가이와 부금(금지된 사랑)
양반집 규수 가이와 종 부금은 신분 제약을 넘어 비밀리에 사랑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몰래 혼례를 치렀으나 신분 초월의 대가로 엄격한 사회 제재를 받았다. - ‘달거리 노래’의 낭만
이안중의 시 ‘달거리 노래’ 등 조선 시가에는 첫날밤에도 서로를 향한 애틋함을 시로 표현한 사례가 많다. 간접적이지만 진솔한 마음을 담은 시문 교환 방식이 조선시대 연애의 핵심이었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결혼 전 연애 사례들은 시대별 사회 제도나 신분 제약 속에서도 개인의 감정과 사랑을 추구하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각 시대의 연애 일화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사회·문화적 배경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습니다.
2025.07.24 - [분류 전체보기] -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가능했을까? : 조선 사회의 결혼과 이별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가능했을까? : 조선 사회의 결혼과 이별
현대 사회에서 이혼은 개인의 권리이자 선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과연 조선시대에도 부부가 갈라설 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에도 이혼이라는 개념은 존재했으나, 그것은 오늘날과는 확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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