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이혼은 개인의 권리이자 선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과연 조선시대에도 부부가 갈라설 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에도 이혼이라는 개념은 존재했으나, 그것은 오늘날과는 확연히 달랐고, 특히 여성들에게는 매우 제한적이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시대 ‘이혼’이란 무엇이었는지, 계층과 성별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법과 관습, 그리고 실제 기록된 일화들을 다뤄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이혼의 두 얼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완전히 없진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이혼이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이(離異)’, ‘출처(出妻)’, ‘휴기(休棄)’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부부 해체를 표현했습니다. 주로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내치는 형식이 많았고, ‘이혼’이란 일은 남성의 특권에 가까웠습니다. 여성이 직접 이혼을 요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평민과 양반, 계층에 따라 달랐던 이혼의 현실
- 평민과 천민: 비교적 이혼이 잦은 편이었습니다. 간단한 ‘사정파의(事情罷議)’라는 합의 절차나 저고리 깃을 잘라 서로 교환하는 ‘수세’로 이혼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 양반과 왕족: 이혼이 극도로 제한되었습니다. 혼인 자체가 집안과 가문의 문제였기 때문에 엄격한 사회적, 법적 제약이 따랐습니다. 여성은 재혼 자체가 금지되었고, 남성 역시 임의로 아내를 내치면 가문의 명예와 체통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어 실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칠거지악”과 “삼불거” : 조선시대 이혼의 법적 기준
조선시대에는 명문화된 이혼법이 없었으나, 상대적으로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과 조선 자체의 관습법이 적용됐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불거’(三不去) 입니다.
칠거지악(七去之惡)
남편이 아내를 내칠 수 있는 이유로서 다음 7가지를 들었습니다.
이유내용
불효 | 시부모에게 불효하는 행위 |
무자 | 자식이 없는 경우 |
음란 | 음란하거나 바람을 피우는 경우 |
질투 | 지나친 질투로 집안 해를 끼치는 경우 |
악질 | 고질적 병(난치병) |
다언 | 너무 말이 많아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경우 |
도둑질 | 도둑질을 하는 경우 |
위의 이유가 확실하면 남편은 ‘원천적 권한’으로 아내를 내칠 수 있었습니다.
삼불거(三不去)
반면 남편이 내쫓지 못하는 예외 사유도 규정되어 있습니다.
- 아내가 시부모의 3년 상을 치른 경우
- 가난한 신분으로 혼인하였으나 이후 부자가 된 경우
- 아내가 돌아갈 친정집이 없는 경우
이 둘은 남성이 임의로 이혼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한계에 갇힌 여성의 이혼 요구 권리
조선사회는 분명 ‘가부장제’ 사회였습니다. 혼인 해체에 관한 주된 결정권은 남성에게 있었으며, 여성은 거의 권한을 갖지 못했기에 ‘이혼 요구’란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성이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던 극히 제한적인 상황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남편이 처가 가족, 특히 친정 부모를 구타하거나 학대한 경우
- 남편이 아내의 친정 부모와 간통한 경우 (일명 ‘의절’이라 불리는 강제 이혼 요구)
- 남편이 3년 이상 행방불명된 경우
- 남편이 아내를 속여 다른 남자와 간통하게 부추긴 경우
- 남편의 심각한 폭력이나 학대가 있었던 경우 (다만 법적 인정은 대부분 미미)
하지만, 이런 경우도 극히 예외적이었고, 대부분의 여성은 이혼 할 권한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성에게 ‘이혼’은 단순한 결별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양반 여성에게 이혼은 단순히 부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말 그대로 ‘패가망신’의 길이었습니다. 며느리에게는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라”는 말이 반복적인 도덕 교육으로 주입되었죠. 실제로 조선시대 양반 여성은 개가(재혼)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이혼을 했더라도 친정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회적 투명인간’이 되곤 했습니다.
- 개가(재혼)가 원천 금지, 친정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
- 친정집으로 돌아가기 어렵고 사회적 낙인 심각
- 이혼 시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패가망신’으로 간주되어 삶의 터전을 잃음
즉, 여성에게 이혼 요구는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하는 극단적인 선택이었으며, 실제로 법률과 관습 모두 여성 불리한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조선시대 이혼 사례
- 평민 박의훤의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 : 1602년, 박의훤이라는 평민은 다섯 번이나 결혼했으며, 그 중 네 명의 아내와 모두 이혼했다고 기록에 남겼습니다. 이유는 아내들이 모두 ‘부정(不貞)’을 저질렀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평민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혼과 재혼을 반복할 수 있었으며, 이는 특별한 사회적 낙인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던 계층임을 보여줍니다.
- 최덕현의 위자료 이혼 사례 : 19세기에 살았던 최덕현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자, 엽전 35냥을 위자료로 주고 혼인 관계를 파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평민과 천민의 삶에서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보다는 차라리 이혼이 낫다’는 인식도 존재했음을 보여주죠.
- 왕실의 이혼과 그 비극 : 조선 초기에 왕의 후손인 임영대군, 영응대군, 제안대군 등도 이혼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아내의 ‘불순부모’(시댁에 불효)나 병을 사유로 들며, 심지어 왕의 명령에 의해 이혼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왕실에서조차 인륜보다는 가문의 명예와 권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혼이 남긴 흔적과 현대사회에 주는 시사점
조선시대의 ‘이혼’은 현재와는 그 개념과 실천 방식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주체 역시 오직 남성, 주요 이유는 여자의 결함 혹은 가문의 명예와 권력 유지에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다양한 계층과 실제 사건, 그리고 일부 인물의 일화를 통해 ‘완전히 억압되고 금지된 제도’는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현대사회에서 이혼은 개인의 선택과 권리로 받아들여지지만, 조선에서 이혼은 곧 ‘가정과 국가 질서’의 파괴로 인식되었기에 애정 없는 부부 생활이 지속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 안에서 희망과 좌절을 오갔던 이들의 인간적인 고뇌는 오늘의 우리에게 ‘삶의 선택과 존중’이 왜 중요한지, 사회와 제도가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