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 부산과 마산, 민주화를 향한 거리의 외침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거리에는 거대한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부마항쟁(부산·마산 민주항쟁)'은 유신체제에 맞선 최초의 대규모 시민 항쟁으로, 한국 민주화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이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주곡이었습니다.
유신체제 속 한국 사회의 현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한국 사회는 철저히 억압적인 체제로 전환됩니다. 대통령은 장기집권이 가능해졌고, 국회와 언론, 민주적 제도 장치는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는 봉쇄되었고,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는 언제나 ‘불순분자’로 몰려 탄압받기 일쑤였습니다.
경제 상황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물가는 급등했고,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정치적 억압과 생활고가 맞물리면서, 한국 사회 곳곳에는 분노와 좌절이 쌓여 갔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부산과 마산은 유신체제를 향한 저항의 불길이 치솟는 무대가 됩니다.
부산에서 시작된 민주화의 불씨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며 항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도심으로 나아가 시민들에게 호소했고, 시위는 곧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동아대·경성대·서울대 분교 학생들도 합류하면서 시위 규모는 수천 명으로 커졌습니다.
놀라운 점은 시민들의 적극적 동참이었습니다. 상인, 노동자, 심지어 주부들까지 거리로 나와 학생들의 외침에 호응했습니다. 학생 시위로 출발했지만, 순식간에 시민 전체가 함께한 항쟁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자각이 부산의 거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 부산대학교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시내로 진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5,000여 명이 교내 집회를 연 뒤 세 갈래로 나누어 대학 담벼락을 실제로 허물고, 최루탄을 쏘는 경찰을 격파해 시내로 진출합니다. 학생들은 남포동, 부산시청 앞, 광복동 등 중심가에 모여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직원들도 막으려 했지만 시위대의 열기를 멈추지 못했습니다.
- 시민 격문과 항쟁지도
시민들은 직접 시위에 참여할 뿐 아니라, 항쟁지도를 그리거나 격문을 배포해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이웃을 깨우라!” 같은 문구가 거리에 퍼졌습니다. - 공권력의 폭력, 경찰 폭행 사건
계엄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경찰마저 시민 폭행을 말리다 집단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산 동부경찰서 경위가 거리에서 군인들에게 맞았다는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 주부·상인들의 연대
마산에서는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아이를 돌보던 주부들이 “유신 철폐” 구호에 동참해 거리로 나왔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들은 도시민 전체가 항쟁에 총력으로 나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됐습니다.
마산으로 번진 항쟁의 열기
10월 18일, 항쟁은 마산으로 번졌습니다. 마산은 이미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도시였던 만큼 민주화에 관한 시민들의 의식이 높았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유신 독재 철폐”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일부 공공기관 건물이 파손될 정도로 분노가 거셌고, 경찰과의 충돌도 극심했습니다.
- 마산 3·15 의거탑 앞 투석전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약 1,000명이 마산 3·15 의거탑 앞에서 기동 경찰 300여 명과 투석전을 벌입니다. 이후 고교생, 노동자,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까지 시위에 합류해 저항의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밤이 되자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습니다. 마산의 민주공화당 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부산·마산 두 도시에서 동시에 항쟁이 벌어지자 정부는 극도의 긴장에 휩싸였습니다. 시위를 단순한 학생운동으로 치부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상인, 주부 등 다양한 계층이 연대하여 독재 권력에 맞선 도시민 항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가 권력의 강경 진압
정권은 즉각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까지 투입했으며, 수천 명이 연행되거나 구금되었습니다. 고문과 폭행 등 인권 침해도 잇따랐습니다. 항쟁은 며칠 만에 물리적으로는 잠재워졌지만, 결코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마항쟁이 남긴 파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집권층 내부에서도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높아졌습니다. 결국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유신체제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부산과 마산에서 분출한 시민들의 외침은 독재 권력의 균열을 불러온 것입니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환점
물론 이후 한국 사회는 다시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 쿠데타로 암울한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단순한 ‘패배한 시위’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 민주주의를 바라는 시민 사회의 잠재적 힘을 드러냈고,
- 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이 전국적 변화를 예고했으며,
- 권력의 절대성을 흔들며 유신체제의 붕괴를 앞당겼습니다.
이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큰 흐름 속에서 중요한 디딤돌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부마항쟁이 발생한 지 수십 년이 흐른 오늘날, 당시의 희생과 용기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첫째,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과 희생 속에 쟁취한 권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지역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독재 권력에 맞섰다는 사실은 지금도 지역 민주주의의 소중한 전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셋째, 평범한 사람들이 연대했을 때 사회를 바꾸는 힘이 얼마나 큰지 부마항쟁은 보여줬습니다.
부산과 마산의 가을 거리에서 울려 퍼진 외침은 비록 잠시 막혔지만,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강물로 흘러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강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 이 글을 마치며,
부마항쟁은 단지 1979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가치와 책임을 되새기게 하는 거울입니다.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용기 있는 연대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오늘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