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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역사 : (3) 1970~1980년대 한국영화, 격동의 시대 그리고 시대의 이중성

이모는오늘도 2025. 8. 23. 22:16

한국영화사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정치적 격변과 사회문화적 변화가 교차했던 시기로, 검열과 탄압 속에서도 새로운 영화 언어와 미학을 탄생시킨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영화 '별들의 고향' (Heavenly Homecoming to Stars)
1974 작
한국 영화 역사 : (3) 1970~1980년대 한국영화, 격동의 시대 그리고 시대의 이중성 / 영화 '별들의 고향' 중 : 이미지 출처 네이버

 

 

 

1970년대 : 영화산업의 위기와 청년영화의 부상

영화산업의 구조적 위기

1970년대는 한국영화 산업에 있어 '암흑기'로 불립니다. 이 시기 영화산업의 위축에는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TV 수상기 보급량은 1966년 43,684대에서 1973년 1,282,122대로 30배 가까이 증가했고, 1970년대 들어 100만 대를 넘어서면서 텔레비전은 가장 중요한 대중매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로 인해 관객들이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값싸게 영상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외국영화의 급속한 시장 침투도 한국영화의 위축을 가속화했습니다. 기존의 한국영화들보다 신선한 재미를 제공하는 미국영화들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한국영화들은 외국영화 수입을 위한 쿼터제를 맞추려는 목적으로 저질의 졸작들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양산하게 되었습니다.

 

유신체제 하의 영화 검열

1970년대 중반 이후 유신체제의 출범과 함께 영화 검열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함께 문화공보부는 '안보 우선 주체의식 고취'를 내세우며 영화 검열 기준을 강화했습니다.

 

검열의 강화 과정을 살펴보면, 1973년 2월 유신정권이 제4차 영화법을 개정하면서 영화제작사를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하고 외화 수입 쿼터제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소수의 제작-수입사를 통해 영화 콘텐츠 전반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검열의 실상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 시나리오 반려 비율이 1970년 3.7%에서 1975년에는 80%로 급증했습니다. 1975년 5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 발령으로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영화 시나리오 사전심의 수정·반려 비율이 1974년 41%에서 1975년 80%까지 높아졌습니다.

 

청년영화의 등장과 새로운 가능성

이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1970년대는 '청년영화'라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한 시기였습니다. 청년영화는 당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하에서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하며 번민하고 고뇌하는 청년들을 그려내어 젊은 청년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주요 작품들을 통해 이 흐름을 살펴보면:

  •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최인호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전국적인 신드롬을 낳았습니다. 46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1970년대 젊은이의 뜨거운 낭만과 경직된 시대상을 잘 함축한 작품으로, 한국 최고의 청춘영화로 꼽힙니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면서,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했습니다.
  •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1975): 하층 여성들의 비극을 병적인 정조로 담아낸 작품으로, 이 시기 청년영화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들 영화는 **'영상시대'**라는 동인을 중심으로 한 젊은 작가들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1970년대 하층 여성들의 비극, 젊은이들의 고뇌와 우울을 병적인 정조로 담아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책영화와 문화정책

유신시기 정부가 장려했던 것은 **'국책영화'**였습니다. 영화는 정부정책 홍보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영화진흥공사로 하여금 문예, 반공, 계몽 등 부문에서 국책영화를 제작하도록 했습니다.

 

대표적인 국책영화로는 《세조대왕》(1970), 《성웅이순신》(1971), 《난중일기》(1977), 《세종대왕》(1978)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영화에서 남성 지도자들은 국가를 수호하고 민족을 이끄는 '하드 버디' 영웅으로 등장했으며, 유신체제의 총화이데올로기를 은유하고자 한 정치적 목적이 노골화되었습니다.

 

 

 

1980년대 : 변화의 시작과 새로운 가능성

정치적 격변과 영화정책의 변화

1980년대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등장으로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점진적인 자유화와 개방화를 향한 움직임이 나타난 시기였습니다.

 

검열 정책의 변화를 살펴보면, 전두환 정권은 한국영화에 대한 '선물'로 에로 영화에 대한 검열을 완화했습니다. 덕분에 1980년대 초중반 극장가는 갑자기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에로 영화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광주학살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가리고 호도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영화법 개정과 시장 자유화

1984년과 1986년 두 차례의 영화법 개정이 단행되었습니다. 1984년 제5차 영화법 개정은 국가적 차원의 각종 통제 및 규제의 완화와 합리적 정책 수립에 대한 영화계의 요청을 반영했습니다. 이어 1986년 제6차 영화법 개정은 한미 당사자들 간 영화 협상의 결과로 이루어졌습니다.

 

청춘영화의 지속과 변화

1980년대에도 청춘영화의 전통은 이어졌습니다. 김응천 감독이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영화로 변형시켰으며,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모모는 철부지》(1980), 《달려라 풍선》(1980), 《대학 얄개》(1982), 《대학 들개》(1983) 등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들은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등을 테마로 했습니다.

 

새로운 감독들의 등장

1980년대는 배창호와 같은 새로운 감독들이 부상한 시기였습니다. 배창호는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하여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적도의 꽃》(1983),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등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연출했습니다.

 

특히 **《깊고 푸른 밤》(1985)**은 당시 관객에게 서구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을 부여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이나 분위기를 차용하면서도 미국 현지에서 완성도 있는 대중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시도로 평가받았습니다.

 

코리안 뉴웨이브의 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제작 자유화 물결과 정치적 유화 국면을 타고 장선우, 박광수, 이명세, 정지영 등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사회비판적 작품들을 내놓았으며, 국내외 영화학자들은 그들의 작품 경향을 묶어 '코리안 뉴웨이브'로 명명했습니다.

 

특히 장선우는 《성공시대》(1988)를 통해 한국식 자본주의를 우화적 표현으로 풀어내며, 1990년대를 휘저을 파격적인 행보를 예고했습니다.

 

 

 

시대적 의미와 평가

1970~1980년대 한국영화는 검열과 탄압이라는 외적 조건과 새로운 영화 언어를 찾으려는 내적 열망 사이에서 벌어진 긴장의 산물이었습니다. 비록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이 시기 영화인들은 시대의 모순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습니다.

 

특히 청년영화의 등장은 기존의 멜로드라마 중심에서 벗어나 동시대 청년들의 현실과 고뇌를 진솔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970~1980년대 한국영화는 단순히 '침체기'가 아닌, 변화와 실험의 시대였으며, 검열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던 창작 정신의 시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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