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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역사 : (1) 1920년대 무성영화부터 6.25 전쟁까지, 한국영화의 시작

이모는오늘도 2025. 8. 21. 22:05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1926) 포스터 : 이미지 출처 KMDb
한국 영화 역사 : (1) 1920년대 무성영화부터 6.25 전쟁까지 / 나운규의 <아리랑>(1926) 포스터 : 이미지 출처 KMDb

 

 

무성영화 시대 개막, 조선영화의 첫걸음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로 조선 영화의 역사가 시작된 뒤, 1920년대 전반은 본격적인 무성영화 시대의 태동기였다. 특히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나오기 전까지는, 조선인 영화인들이 일본인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영화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조선인 감독의 첫 영화, <월하의 맹서> (1923)

윤백남이 각본·연출하고, 배우 이월화가 출연한 이 작품은 첫 조선인 감독의 극영화로 평가된다. 다만 상업영화가 아닌 조선총독부의 저축 장려 계몽영화였으며, 촬영은 일본인이 맡았다. 비록 제작 환경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스토리텔링과 배우 연기 면에서 조선인의 주도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첫 사례였다.

 

상영 하루 만에 중단된 <국경> (1923)

재조선 일본인들이 제작한 이 영화는 국경 지대 일본 국경수비대의 활약을 그렸으나, 조선인 관객들에게는 독립군 모욕 영화로 비쳤다. 그 결과 학생들의 집단 야유 속에 단 하루 만에 상영이 중단되었다. 이는 조선 관객이 식민지적 영화 서사를 거부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첫 상업영화 <춘향전> (1923)

일본인 흥행사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제작·연출한 작품으로, 조선 고전소설을 영화화한 최초의 상업영화이다. 주연은 변사 김조성과 기생 한명옥이 맡았으며, 조선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아 흥행에 성공했다. 다만 조선 고전에 맞춰 연출과 각색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조선인 영화인의 역할이 불가피했다.

 

순수 조선 제작진의 <장화홍련전> (1924)

단성사의 박승필이 주도하고, 김영환, 박정현, 이필우 등 조선인 각본·감독·촬영 인력이 총출동한 작품이다. 출연 또한 조선 배우들로 꾸려져, 제작 전 과정이 조선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개봉 직후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일본인 제작의 <춘향전> 재개봉으로 이어지는 흥행 경쟁이 펼쳐졌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설립 (1924)

부산에서 일본인 사업가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나, 윤백남, 이경손, 안종화 등 조선 영화인들도 합류하며 제작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훗날 스타가 되는 나운규가 엑스트라로 첫 출연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인 감독과 배우가 성장할 수 있는 현장 도제 시스템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리하면, 

1923년부터 1925년까지 12편의 조선 영화가 만들어졌다. 일본인 자본과 기술이 절대적이었지만, 윤백남·이월화·김조성·박정현·이필우 등 조선 영화인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 관객을 위한 조선적 서사,
  • 무대극 출신 배우들의 연기력 발전,
  • 영화 기술 습득과 촬영 독립
    등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결국, 이 시기는 식민지 권력과 협상하며, 동시에 조선인 스스로의 영화 문법을 개척해 나간 무성영화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해방 이후와 혼란기의 한국영화 (1945~1950년대 초)

광복과 함께 새로운 시작, 민족 정체성을 담은 영화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한국 영화계에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식민지 시기 검열과 통제를 벗어난 영화인들은 “민족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을 제작하려 했다. 해방 직후에는 남한에 약 20여 개의 영화사가 생겨났고, 조선영화건설본부 등 영화 단체들이 설립되어 새로운 영화운동을 시도했다.

특히 민족 정체성과 해방 공간의 열망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곧이어 좌우 이념 대립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영화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표작, 《명월관 남자들》(1947)

해방 후 제작된 영화 중 가장 대표적으로 꼽히는 작품은 1947년 신경균 감독의 **<명월관 남자들>**이다. 이 영화는 해방 공간에서의 혼란과 서민들의 삶을 풍자적 시선으로 담아냈다. 작품의 배경은 조선시대 마지막 기생집 명월관이었으며, 여기 모인 인물들을 통해 해방 이후 사회 곳곳에서 등장하는 기회주의자와 혼란상을 풍자했다.

<명월관 남자들>은 해방 이후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영화로 기록되며, 해방 공간에서 영화가 현실 참여와 풍자를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한국전쟁 발발과 영화계의 붕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신생 한국 영화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 많은 영화관이 파괴되고,
  • 영화 필름이 소실되었으며,
  • 주요 영화인들이 월북하거나 피난을 떠나 제작 기반이 무너졌다.

이 시기 영화는 예술·상업적 작품보다는 전쟁 기록과 정치적 선전에 초점이 맞춰졌다.

 

전쟁 중의 기록영화와 선전영화

정부와 군부는 전쟁 동원과 사기 진작을 위해 기록영화와 선전영화를 제작·상영했다.

  • 국방부와 공보처 주도로 전쟁 상황을 기록한 뉴스영화가 제작되었고,
  • “반공”과 “승전”을 강조하는 선전영화들이 대규모로 배급되었다.

특히, 군 영화제작소가 설치되어 전선의 실황을 기록하거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전쟁기 영화들은 작품성보다는 정치적 기능과 시청각 교육적 목적이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민간 주도의 영화 제작: 제한적 시도

전쟁기에도 일부 민간 영화사와 감독들이 피난지에서 영화를 제작하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자금 부족과 시설 파괴로 인해 완성된 작품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부산 같은 피난 수도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영화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으나, 본격적인 영화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지려면 전쟁 종결 이후를 기다려야 했다.

 

혼란기의 영화사적 의미

1945년부터 1953년 정전까지의 한국 영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1. 해방 직후 : 민족의 해방과 정체성을 담으려는 이상주의적 작품의 등장
  2. 1947년~1950년 : <명월관 남자들> 같은 풍자적 상업영화의 성공 → 한국영화 산업 가능성의 첫 확인
  3. 전쟁기 : 기록·선전영화 중심 → 영화가 국가 동원의 장치로 활용
  4. 피난 수도(부산)의 영화인 집결 → 훗날 1950~60년대 황금기의 토대 마련

 

 

정리하면, 

해방 이후 한국 영화는 짧지만 뜨겁게 타오른 “민족 영화의 열망”과 6.25 전쟁으로 인한 붕괴와 동원의 경험이라는 두 축 위에 서 있었다.

  • <명월관 남자들>은 해방기의 대표작으로 사회 비판적 풍자를 담았고,
  • 전쟁 중에는 국가 주도의 기록영화, 선전영화가 거의 유일한 제작물이었으며,
  • 이 속에서 살아남은 영화인들은 이후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황금기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했다.

 

 

 

 

** 한국영상자료원 바로가기 : https://www.koreafilm.or.kr/pages/PC_00000241

 

한국영화를 보다 -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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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oreafilm.or.kr

 

** 아리랑아카이브 바로가기 : https://arirang.iha.go.kr/service/story.nihc?folder_rowid=1

 

아리랑아카이브

나운규는 인력, 자본, 대중들의 영화 인식까지 부족한 현실에서 자기희생을 전제한 신념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 그는 시대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중반, 영화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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