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중요한 변혁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방화(邦畵)'라 불리며 외면받던 한국영화가 현재와 같은 경쟁력 있는 한국영화의 토대를 마련한 결정적인 10년이었습니다.
정책적 변화와 제도 개혁
1990년대 한국영화계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영화 정책의 전환이었습니다. 1995년 12월 30일, 30년 이상 지속된 규제 중심의 「영화법」이 「영화진흥법」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는 국가적 통제 중심에서 진흥 중심으로의 정책 전환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1996년 사전심의제가 폐지되어 영화 제작의 자유가 대폭 확대되었습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외국영화 수입이 자유화되는 등 영화 제작의 자유와 다양성을 보장하는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할리우드 직배 체제와 스크린쿼터 논란
1988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이 'UIP코리아'를 설립하여 직접 배급을 시작한 것은 한국영화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1989), 콜롬비아트라이스타(1990), 월트디즈니(1993) 등이 연이어 직배 체제에 참여했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영화계의 대응책이 바로 스크린쿼터제의 강화였습니다. 1984년부터 의무상영일수가 146일로 설정되었고, 1993년 스크린쿼터 감시단이 발족하면서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준수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구조의 변화: 대기업 자본 진입
1990년대 한국영화계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대기업 자본의 본격적인 진입이었습니다. 삼성, 대우, SKC, LG, 현대 등 대기업들이 영화 제작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에는 대기업들이 약 70편의 영화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비디오 판권 구입 방식을 넘어서 제작비 전액 투자, 공동 투자 등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영화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기획영화의 등장
1990년대 한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기획영화'의 등장이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에서 시작되어 「결혼이야기」(1992)로 구체화된 기획영화 시스템은 감독 중심에서 프로듀서 중심의 제작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결혼이야기」는 대기업(삼성전자)이 제작비의 절반을 제작 전에 투자하는 방식을 처음 도입했고, 「은행나무 침대」(1996)는 금융자본과 한국영화가 만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제작 현황과 통계
1990년대 한국영화 제작 현황을 보면, 1989년 110편, 1990년 111편, 1991년 121편을 기록한 후, 1992년 96편으로 감소하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에는 60 편대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최저'의 제작 편수였습니다.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도 1990년 28.7%에서 1993년 15.4%로 급격히 하락했다가, 1994년부터 20%대를 회복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1999년 「쉬리」의 성공으로 39.7%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대표작품과 감독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장군의 아들」 시리즈(1990~1992), 「서편제」(1993), 그리고 마침내 「쉬리」(1999) 등이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로 한국영화의 흥행 신기록을 경신하며 '국민감독'이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의 기념비적 작품들
「장군의 아들」 시리즈 (1990-1992)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1990)은 1990년대 한국영화의 문을 연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서울 기준 67만 8,946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습니다. 1990년 10월 25일, 개봉 130일 만에 58만 5,897명을 기록하며 그때까지의 최고 기록이었던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58만 5,775명)를 13년 만에 경신했습니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협객 김두한의 청년기를 다루며, 사나이들의 우정과 의리를 그리면서 일제강점기 억압받는 민중의 울분을 담아냈습니다. 박상민, 신현준, 방은희 등 신인 배우들을 대거 기용해 스타 등용문 역할도 했습니다. 특히 서울예전 1학년 생이던 박상민은 1,575명의 지원자 중에서 선발되어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서편제」 (1993)
임권택 감독의 또 다른 걸작 「서편제」는 1993년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개봉 122일 만인 1993년 8월 9일 오전 11시 20분, 67만 8,947번째 관객이 입장하며 「장군의 아들」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개봉 204일 만인 1993년 10월 30일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가 되었습니다.
「서편제」는 판소리에 서린 우리 민족의 한을 그린 작품으로, 비수기인 4월 10일 단성사에서 단관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칭찬과 입소문에 힘입어 관객을 늘려나갔습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5월 1일 청와대에서 영화를 관람한 것이 화제가 되며 중년층이 극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990년대를 이끈 감독들
거장 감독: 임권택
임권택 감독은 1990년대 진정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장군의 아들」(1990)로 포문을 연 그는 「개벽」(1991),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까지 '인본주의'라는 고유한 테마를 20세기 한국사의 풍경에 투영시켰습니다. 그의 영화 포스터에는 굵직한 서체로 단순하게 "감독 임권택"이라고만 적혀 있을 정도로 자기 확신이 느껴졌습니다.
한국 뉴웨이브의 선구자들
장선우
장선우 감독은 1988년 「성공시대」로 한국 자본주의의 폐부를 건드리며 데뷔했습니다. 1990년 「우묵배미의 사랑」은 지금도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작입니다. 그는 사회적 리얼리즘의 깃발을 들며 전통적 영화어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도 영화를 당대 현실 깊숙이 끌고 들어갔습니다.
박광수
박광수 감독은 1988년 「칠수와 만수」로 도시빈민, 장기수 같은 예민한 사회적 이슈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1990년 「그들도 우리처럼」에서는 도피 중인 대학생 기영을 따라 탄광촌으로 들어갔고, 19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는 70년대 평화시장의 전태일을 그렸습니다. 그는 운동권과 노동자라는 이전까지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존재들의 얼굴을 영화에 담았습니다.
이명세
이명세 감독은 1988년 「개그맨」으로 데뷔하며 제3의 인물로 외롭게 등장했습니다. 영화가 개인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굳게 믿는 그는 영화 형식을 본격적으로 고민한 거의 최초의 한국 감독이었습니다. 1990년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서울 피카디리 개봉관에서만 상영했음에도 20만 명이 넘는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19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흥행·작품성 양면에서 거의 최상급 실적을 올렸습니다.
전통파 감독들
배창호
1980년대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 등을 연출하며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군림해 온 배창호 감독은, 1990년대에도 「꿈」(1990) 등을 통해 외적인 재미와 내적 흥미를 동시에 추구했습니다. 그의 영화 전단지는 길쭉한 세로 종이에 '꿈'이라는 글자를 굵게 새기는 등 단순하고 정직한 스타일을 보여주었습니다.
박철수
박철수 감독은 1980년대 「어미」(1985), 「안개기둥」(1986), 「접시꽃 당신」(1988) 등을 통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 후, 1990년대에 과감한 도약을 했습니다. 1995년 「삼공일 삼공이(301, 302)」는 식욕과 성욕을 결합한 프로이트의 테마를 지닌 독특한 작품으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는 의지가 잘 드러났습니다.
흥행과 예술성을 겸비한 감독들
강우석
강우석 감독은 1988년 「투캅스」의 흥행 성공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흥행감독에서 제작자 겸 배급업자로 변신했습니다. 그는 「투캅스 2」, 「넘버. 3」, 「편지」 등 잇단 흥행작을 통해 시네마서비스를 충무로 제1의 메이저영화사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씨네 21 창간 이래 한 번도 한국영화산업을 움직이는 파워맨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정지영
정지영 감독은 1990년 「남부군」으로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1987년 영화인 시국성명을 주도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1970년대부터 독일문화원과 프랑스문화원을 드나들었던 초기 문화원 세대였으며, 사회의식이 강한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곽지균
곽지균 감독은 1986년 「겨울나그네」로 데뷔해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신세대 감독으로 활약했습니다.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하고 대종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며 비평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1991년 「젊은 날의 초상」으로 대종상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의 새로운 움직임
차세대 감독들의 등장
1990년대 후반에는 박찬욱, 김기덕 등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찬욱은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감독 데뷔를 했지만 상업적으로 흥행하지 못했고, 이후 5년간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99년 단편 「심판」을 통해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옴니버스 영화의 시도
1996년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는 강우석, 정지영, 김유진, 박철수, 장현수, 장길수, 박종원이라는 199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15분씩 옴니버스 형태로 만든 실험적 작품이었습니다. 이는 1990년대 한국영화계의 역량을 보여주는 상징적 작품이었습니다.
영화 기술과 인프라의 발전
1990년대는 한국영화의 기술적 발전도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디지털 촬영 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컴퓨터 그래픽과 특수효과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구미호」(1994)를 위해 준비한 디지털 특수시각효과(VFX) 장비와 인력이 「은행나무 침대」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사운드 기술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5.1 사운드 시스템의 등장으로 영화관에서의 음향 경험이 혁신적으로 변화했고, 관객들은 더욱 몰입감 있는 영화 관람이 가능해졌습니다.
시네마테크 문화의 확산
1990년대는 시네마테크 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영화공간 1895'(1989년경)를 시작으로 '문화학교 서울', 대구의 '영화언덕', 대전의 '컬트', 부산 '1/24' 등 전국 각지에 시네마테크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들 시네마테크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수입이 금지된 영화들을 상영하며 '시네마테크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현재 한국영화계를 이끄는 봉준호, 류승완, 박찬욱 등 많은 감독들이 이 시기 시네마테크를 통해 다양한 영화를 접하며 영화적 안목을 키웠습니다.
국제 교류와 영화제 문화
1990년대에는 영화제 개최와 국제 교류도 활발해졌습니다. 1996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이 시작되었고, 인디포럼, 십만 원 비디오 영화제 등 독립영화제도 성황을 이뤘습니다.
1995년에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예술영화 「희생」(1986)이 개봉해 2만 4천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습니다. 이는 예술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90년대 한국영화는 정책 변화, 산업구조 개편, 새로운 제작 방식 도입, 기술 발전, 문화적 기반 확충 등 전방위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비록 제작 편수나 시장 점유율 면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 시기의 변화들은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은 90년대의 발명품인 셈이며, 20세기말의 이러한 대혁신이 있었기에 한국영화는 21세기에 봉준호 감독이 말한 '1인치의 장벽'을 넘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이 시기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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