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시대는 한국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문화예술의 전성기 중 하나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유물이 바로 경천사 10층 석탑과 고려청자다. 이 두 유물은 단순한 미술품을 넘어 고려의 종교적 세계관과 국제적 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경천사 석탑은 고려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 걸작이며, 고려청자는 독창적인 상감기법으로 세계 도자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특히 고려청자는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심지어 아라비아까지 수출되며 고려를 '코리아 (Korea)'로 알린 국제적 명품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경천사 석탑의 역사와 의의, 고려청자의 아름다움과 기술, 그리고 고려 도자기가 세계 무역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본다.
경천사 10층 석탑의 역사적 가치
경천사 10층 석탑은 1348년(충목왕 4년)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에 세워진 대규모 대리석 석탑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높이 13.5미터에 달하는 이 석탑은 현존하는 고려 석탑 가운데 가장 높은 형태를 자랑하며, 고려 후기 불교미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원래 개성의 경천사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석탑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아자형 기단과 대리석 재질이다. 3단으로 구성된 기단부는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며, 10층의 탑신부 역시 1-3층까지는 아자형, 4층부터는 정사각형으로 변화한다. 일반적인 화강암 대신 회색 대리석을 사용한 것도 매우 특이한데, 이는 목조건축의 세밀한 구조를 정교하게 재현하기 위함이었다. 탑 표면에는 불·보살상과 불경 속 장면들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어 당시 불교 신앙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건축물을 넘어 고려 장인의 뛰어난 석공술과 예술적 창의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탑신 전체에는 부처상, 보살상, 천부상, 나한상 등 불교 조각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은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까지 표현해 마치 실제 목조건물을 옮겨놓은 듯한 정교함을 자랑한다. 1층 몸돌에 새겨진 조성기록을 통해 강융과 원사 고용봉의 시주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당시 고려 후기 친원 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반영한다.

고려청자의 예술성과 기술적 혁신
경천사 석탑이 불교미술의 정점이라면,고려청자는 고려 공예의 정수를 상징한다. 고려청자는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제작된 고려 도자기의 대표작으로, 특히 12세기 전후에 제작된 상감청자는 세계 도자사상 유례없는 기법으로 인정받았다.
고려청자의 핵심은 비색(翡色) 유약에 있다. 12세기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도자기로서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이라고 한다. 근래에 더욱 세련되고 색택이 가히 일품이다"라고 극찬한 바로 그 색이다. 이 신비로운 비취색은 청자 유약에 포함된 '산화철 1.5-3%'가 환원염으로 구워지면서 나타나는 화학반응의 결과물이다.
붉은색과 흰색 흙을 사용해 무늬를 새겨 넣은 후 유약을 발라 굽는 상감 기법은 고려 장인들이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장식기법이었다. 반건조 상태의 청자 표면에 무늬를 음각한 후 백토나 자토로 메우고 청자유를 입혀 구워내는 방식이다. 이 기법으로 매병, 주자, 접시 등 다양한 형태에서 연당초문, 모란당초문, 운학문, 포도동자문 등 다양한 문양이 표현되었으며, 백니는 백색으로, 자토는 흑색으로 발색되어 투명한 청자유를 통해 아름답게 비쳐 나온다. 빛깔 또한 ‘비취옥’처럼 은은한 청록빛을 띠며 “청자하면 고려”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났다. 중국 송나라 사신이 고려청자를 보고 감탄했다는 기록은 물론, 일본 무사 계층이 이를 귀하게 여겼다는 사실에서도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국제 무역과 벽란도 항구
고려시대 벽란도는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고려 최대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개경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이곳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으며, 송나라 사신을 위한 벽란정이 설치되어 벽란도라 불렸다.
벽란도를 통한 고려의 수출품은 금, 은, 구리, 인삼, 고려청자, 나전칠기, 화문석, 모시 등이었고, 수입품으로는 송나라의 비단, 자기, 책, 약재, 아라비아의 수은, 향료, 상아 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청자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들까지도 거래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고려청자의 세계적 무역 네트워크
고려청자가 세계적 명품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증거는 신안선 발굴이다.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14세기 중국 무역선에서는 중국 도자기 수만 점과 함께 고려청자 7점이 발견되었다. 이 청자들은 연꽃무늬 매병, 찻그릇, 잔받침, 베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2-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이들 고려청자가 고려가 아닌 중국 닝보에서 선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당시 송대와 원대에 이미 많은 고려청자가 무역을 통해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닝보는 각종 물산이 모이는 국제적 시장이어서 고려청자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대 명품을 정리한 책 『수중금』에는 청자 중 유일하게 고려청자가 언급되어 있어, 당시 중국에서도 고려청자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는 **'코리아웨어(Korea Ware)'**라는 이름으로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서양까지 전해져, 한국이 '코리아'로 불리게 된 기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도자기 무역의 국제적 영향
고려는 해상 무역이 활발한 나라였다. 바닷길을 따라 개성, 예성강 하구에서 출발한 고려 도자기는 중국 원나라를 거쳐 일본, 동남아시아, 심지어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세계까지 퍼져 나갔다. 고려청자는 단순한 수출품을 넘어 고려 문화의 국제적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 해상 루트와 아랍 상인의 무역망을 통해 중동과 유럽까지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13-14세기 유럽 도자기 컬렉션에 등장하는 "동방의 신비로운 청자"가 고려청자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벽란도 무역항을 통한 고려의 국제교역은 당시로서는 매우 광범위했다. 송나라, 일본뿐만 아니라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 대식국의 이슬람 상인들까지 드나들며 고려를 진정한 국제 무역국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활발한 교역을 통해 고려는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는 고려청자가 단순히 국내 소비품이 아니라 세계적 교역품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중국의 자기와 함께 고려청자가 국제 교역의 중요한 품목으로 자리 잡았고,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이 이를 ‘코리아웨어(Korea Ware)’라 부르며 값지게 거래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고려 도자기 무역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고려 문화가 세계와 소통하고 교류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현대적 의미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오늘날 경천사 10층 석탑과 고려청자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대표 유산이다. 경천사 석탑은 1962년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고려청자는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할 정도로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은 세계 도자사상 독보적인 창조적 기법으로서 후대 조선 분청사기와 현대 한국 도자기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고려 시대의 국제적 문화 교류 전통은 현재 한류 문화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현상과도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경천사 10층 석탑과 고려청자는 단순한 과거 유물이 아니라, 고려인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기술력, 그리고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 의식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이들 유산을 통해 우리는 천 년 전 고려가 이미 세계적 수준의 문화 강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오늘날 한국 문화의 세계적 위상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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