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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 과정과 역사적 의미 : 왕건이 세운 새로운 시대

이모는오늘도 2025. 9. 6. 18:25

918년, 한반도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되었습니다. 송악의 호족 출신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신라 말 혼란스러운 후삼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운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고려 건국 과정과 역사적 의미 : 왕건이 세운 새로운 시대 / 고려 의장기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후삼국 시대의 혼란과 고려 건국의 배경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

9세기 말 신라는 귀족들의 왕위 다툼으로 중앙 집권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진성여왕 이후 신라 귀족 사회의 부패와 정치 혼란이 심화되면서, 각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지방의 군사 세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견훤이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고(900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901년).
 

왕건의 등장과 배경

왕건은 송악(현재의 개성) 지역의 유력한 호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왕륭은 해상무역을 통해 재력을 축적한 송악의 토호였으며, 패서 지역의 여러 호족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896년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하면서 왕건은 궁예의 휘하 장수가 되었고, 불과 20세의 나이에 성주가 되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풍수가 도선의 예언과 ‘삼’을 심으라는 가르침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풍수승려 도선(道詵)을 만난 뒤 받은 예언 이야기입니다.
도선은 왕륭의 집 앞을 지나며 “기장을 심을 터에 삼을 심었으니, 집을 새로 지으면 내년에는 슬기로운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 일렀습니다. 도선이 건넨 봉투에는 “삼한을 통합할 주인이 될 것이다”란 글귀가 써 있었고, 왕륭이 백 번 절하고 지시대로 살자 아들 왕건이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궁예의 실정과 왕건의 거란참효

궁예 정권의 한계

궁예는 초기에는 부하들과 고생을 함께 나누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힘든 세상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면서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915년에는 왕후인 강씨와 두 자식까지 잔인하게 살해하는 등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왕건의 역성혁명

918년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궁성으로 몰려오자 당황한 궁예는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북문으로 빠져나가 도주했지만, 결국 백성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왕건은 즉위 첫날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여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고려 건국의 정치적 전략과 의미

국호 선택의 상징성

왕건이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고구려라는 국호는 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넘어서 보다 포용적이고 발전적인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호족 연합 정책의 구현

왕건은 건국 초기부터 호족들과의 협력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각지의 호족들에게 사신을 보내 예물과 겸손한 말로 포섭하려 했으며, 29명에 달하는 후비 중 대부분이 유력 호족들의 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혼인 정책을 통해 호족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정치적 기반을 안정시켰습니다.
 
**첫 부인 유씨의 갑옷 격려
918년 궁예를 몰아내기로 결심할 때, 주저하던 왕건에게 첫째 부인 유씨가 직접 갑옷을 입혀주며 “이제 결단할 때”라고 북돋웠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부인의 지지가 왕건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나주 오씨와의 ‘돗자리 사랑’
후삼국 시대 말, 왕건은 나주 지방 호족 집안 딸 오씨를 만나 뜨거운 로맨스를 나눴다고 합니다. 둘의 만남을 기리는 사연 중에는 돗자리를 깔고 밤새 애틋한 대화를 나눴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고려 건국의 서막에 얽힌 로맨스로 회자됩니다.
 

애민정책과 불교 장려

왕건은 새로운 국가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조세를 가볍게 하고, 양민으로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켜 주는 등 애민 정책을 폈습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여 나라의 힘을 모으고 사회 통합을 도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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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통일 과정

신라와의 우호적 관계

왕건은 견훤과 달리 신라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포용 정책을 펼쳤습니다.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금성 북쪽 50리 지점에 신광진을 설치하여 고려군을 주둔시키는 등 친신라 정책을 구사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신라는 고려에 호의를 보였고, 결국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며 평화롭게 통합되었습니다.
 

후백제와의 최종 결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하자 고창 주변의 30여 성과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 성이 고려에 복종을 맹세했습니다. 후백제는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약화되었고,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감금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견훤이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한 후,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가 최종 승리하며 후삼국 통일을 완성했습니다.
 
 

고려 초기 정치 제도의 특징

태봉 제도의 계승과 발전

고려 초기의 정치제도는 태봉의 옛 제도를 답습한 광평성 체제였습니다. 왕건은 건국 직후 광평성을 비롯하여 내봉성, 순군부, 병부 등 12개 관서를 설치했으며, 이 중 9개가 태봉제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급격한 변화보다는 안정적인 정권 이양을 추구한 왕건의 현실적 판단이었습니다.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조화

고려는 명목상 전제적 군주가 주권을 갖는 중앙집권적 왕국이었으나, 실제로는 지방 호족들이 반독립적으로 지역을 할거하는 가운데 중앙정부와 협력하는 구조였습니다. 왕건은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를 통해 호족들을 견제하면서도 존중하는 균형 잡힌 정치를 구현했습니다.
 
 

고려 건국의 역사적 의의

진정한 민족 통일의 달성

고려의 건국은 신라의 일방적 통합과는 달리 옛 삼국의 인적·문화적 자원을 통합하여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왕건은 발해 유민을 적극 수용하여 고구려 계승 의식을 구현했으며, 이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진정한 민족 통일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문화 창조의 토대

고려는 옛 삼국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통합하고 포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불교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유교 이념을 수용하고 풍수지리 사상까지 아우르는 포용적 문화 정책을 구사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개방성은 이후 고려가 송,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과 활발한 국제 교류를 펼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474년 장수 왕조의 출발점

918년 건국된 고려는 1392년까지 474년간 지속되며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통일 왕조가 되었습니다. 왕건이 구축한 호족 연합 체제와 포용적 정치 문화는 고려 왕조의 장기 지속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소였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 고려 건국의 교훈

고려의 건국 과정은 현대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왕건은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이후 포용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 통치를 구현했습니다. 지방 세력들과의 상생, 문화적 다양성의 인정, 민생 안정을 위한 정책 등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정치적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분열된 상황에서 통합을 이루어낸 왕건의 리더십은 통일을 꿈꾸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는 일방적인 정복이 아닌 상호 존중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 통합을 추구했으며, 이것이 바로 고려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918년 고려의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닌, 한반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왕건이 보여준 정치적 혜안과 포용의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배울 점이 많은 역사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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