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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명의 고려 왕자·공주, 정략혼의 결과물들 : 고려 왕실 가계도 완전 정리

이모는오늘도 2025. 9. 7. 11:09
34명의 고려 왕자·공주, 정략혼의 결과물들 : 고려 왕실 가계도 완전 정리 / KBS 드라마 '태조 왕건' 포스터 : 이미지 출처 왓챠피디아

 
 
 
고려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 사이에서 총 34명의 자녀(왕자 25명·공주 9명)를 두었다. 이들 중 왕위에 오른 주요 자녀와 대표 자녀는 다음과 같다.
 
주요 왕위 계승자

  • 혜종(恵宗, 왕무/王武): 제2대 고려 국왕
  • 정종(靖宗, 왕요/王堯): 제3대 고려 국왕
  • 광종(光宗, 왕소/王昭): 제4대 고려 국왕

기타 주요 왕자

  • 왕욱(王旭)·왕郁(王郁): 신라 왕실 및 견훤 연합의 결과로 탄생한 왕자군
  • 왕무(王武)(혜종)·왕요(王堯)(정종)의 형제로 ‘大王’ 칭호를 받은 미상왕자들(비석 기록)
  • 왕건의 ‘文’字 계열 왕자들: 文恭王后·文成王后의 부인으로 연결된 문공·문성계 후대 세력

대표 공주

  • 의화왕후 임씨(義和王后 任氏): 혜종의 왕후
  • 낙랑공주(樂浪公主): 경순왕과의 혼인으로 신라 왕실과 맺어진 공주
  • 기타 국왕실 친인척 및 호족가문 연계를 위한 8명의 공주

자녀 통계

  • 총 자녀 수: 34명
  • 왕자: 25명
  • 공주: 9명

태조 왕건의 다자녀와 다양한 혼인 동맹은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호족 세력 결집 및 왕실 정통성 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려 태조(왕건)의 자녀 34인 일람

기록상 확인되는 태조 왕건의 자녀 34명을 아래 표에 정리했다. 가능한 경우 이름·칭호, 출생모(부인), 비고를 포함했다.

번호 자녀 이름·칭호 출생모 비고
1 혜종(王武, 恵宗) 장화왕후 오씨 제2대 국왕
2 정종(王堯, 靖宗)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제3대 국왕
3 광종(王昭, 光宗)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제4대 국왕
4 왕태(太子 太泰) 흥복원부인 홍씨의 딸 요절 추정
5 수명태자(壽命太子) 헌목대부인 평씨 요절
6 효당태자(孝當太子) 동양원부인 유씨 요절
7 효지태자(孝祗太子) 숙목부인 임씨 요절
8 직(稷, OO태자) 흥복원부인 홍씨 요절
9 효제태자(孝悌太子) 신주원부인 강씨 요절
10 효명태자(孝明太子) 월화원부인 요절
11 법등군(法燈君) 소황주원부인 요절
12 자리군(資利君) 소서원부인 김씨 요절·최연소 아들
13 천추전군(千秋殿君) 신정왕태후 황보씨 생존 여부 미상
14 증통국사(證通國師) 신정왕태후 황보씨 출가
15 왕소(昭王)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왕요군’ 별칭
16 왕郁(OO王)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기록 미상
17 광주원군(院君) 광주원부인 왕씨 반역 혐의로 처형
18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 정덕왕후 유씨 공신 세력 결속
19 낙랑공주(樂浪公主) 장화왕후 오씨 경순왕 혼인
20 OO공주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王泰(왕태)의 부인
21 청단궁주(淸端宮主) 후대량원부인 이씨 개성 인근 칭호
22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서전원부인 모·출신 미상
23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동산원부인 박씨 승주 혼인 동맹
24 흥화궁주(興華宮主) 대명주원부인 왕씨 혜종 후궁
25 문원대왕(文元大王)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징효대사탑비 기록
26 필영대왕(弼榮大王)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징효대사탑비 기록
27 청단공주(淸端公主)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병지 기록
28 OO공주 대서원부인 김씨 모·이름 미상
29 OO공주 소서원부인 김씨 모·이름 미상
30 OO공주 서전원부인 모·이름 미상
31 OO공주 소황주원부인 모·이름 미상
32 OO공주 월화원부인 모·이름 미상
33 OO공주 해량원부인 모·이름 미상
34 OO공주 소광주원부인 왕씨 모·이름 미상
 
  • “OO” 표기는 사료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자녀를 가리킨다.
  • 요절한 태자는 대부분 관직·칭호만 전하며, 생몰 연대·사망 사유가 기록에 부재하다.
  • 징효대사탑비에는 혜종·정종·광종과 함께 문원대왕·필영대왕·청단공주 등 일부 자녀가 대왕·궁주로 추존되어 기록되었다.
  • 자녀 수는 34명(25남·9녀)로, 다자녀 전략이 고려 건국 초기 호족 결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자녀들 출생 일화

  1. 첫아들 무의(武義) 태자의 피임·임신 일화
    『고려사』 “태조 본기”에는 왕건이 장화왕후(오씨)의 집안이 미천함을 근심하여 일부러 임신을 피하려고 “돗자리 위에 사정”하였으나, 왕후가 즉시 그것을 몸속으로 들여놓아 결국 임신·출산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피임 의도가 무색하게 된 조선 세종대에 편찬된 고려사 편찬자의 직설적 묘사로 유명하다.
  2.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용꿈
    장화왕후 오씨가 “포구에서 용이 배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후 태조의 둘째 아들 혜종(王武)을 낳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용꿈은 후삼국 통일을 예고하는 상징적 전조로 해석되었다.

그 외 태조 자녀들에 관한 구체적 성장·교육·어린 시절 일화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에 별도로 전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확인 가능한 어린 시절 관련 일화는 위 두 가지가 전부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후계 관련 주요 일화

고려 태조 왕건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은 단순한 세습이 아니라 당시 정치 상황과 왕건의 신중한 결단이 반영된 정략과 드라마로 가득 차 있다. 사료에 전하는 대표적인 일화를 소개한다.

  1. 장남 왕무(혜종)의 ‘황포 선물’ 일화
    왕건은 건국 초기 장남 왕무를 정윤(正胤), 즉 공식적 후계자로 책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918년 새 왕조를 세운 직후 왕무(当時7세)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 가문이 비교적 약했기 때문이다. 결국 921년 왕건은 왕무의 모친에게 ‘황제용 포(자황포)’가 담긴 특별한 상자를 하사하여 중신 박술희에게 보여주도록 했다. 박술희가 “이는 왕무를 태자로 책봉하라는 뜻”이라 해석하자, 왕건은 즉시 10세의 왕무를 정윤으로 삼았다. 이 일화는 왕건이 후계 지정도 정략적 선물과 신료의 의견을 통해 이루었음을 잘 보여준다.
  2. ‘후계 유언’ 일화
    왕건은 말년에 후계자 선정에 대한 **유언(遺命)**을 남겼다. 그 내용은 “원칙적으로 장남이 계승하되, 장남이 능하지 못하면 차남에게, 차남도 부적당할 때는 여러 형제 중 가장 덕망 있는 자가 잇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 유언은 왕권 강화를 위해 혈통 우선 원칙과 ‘능력주의’를 동시에 고려한 융통성 있는 계승 기준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다수의 왕자·호족 세력 간 갈등에 불씨를 남기기도 했다.
  3. 신료 추천에 따른 책봉
    왕건은 중신들의 의견을 중요시하여, 박술희·황현필·이익주 등에게 후계자 문제를 자문받았다. 추천에 따라 장남이 태자로 확정되었고, 이후에도 왕건은 신료의 건의를 적극 수용하며 후계 구도를 공식화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리더십과 호족 통합 정책이 결합되어 후계 문제가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일화들은 태조 왕건이 후계 지정을 단순한 가문 전통이 아닌 정치적 계산과 신료 의견, 능력 평가를 통해 이뤄냈음을 드러낸다. 이는 고려 왕조 초기의 불안정한 정치 지형에서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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