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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학 12도와 과거시험, 사교육 열풍의 역사적 배경

이모는오늘도 2025. 9. 30. 20:31

고려시대 사학 12도의 등장과 사교육 열풍 / 최충 초상 : 이미지 출처 국가유산포털

 
고려시대는 신분이 아닌 실력에 기반한 인재 등용을 지향하면서, 관료 선발과 교육 체계 역시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이 가운데 사학 12도는 과거시험 중심의 사회에서 사교육 열풍을 주도하며 고려의 교육과 사회 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학 12도의 기원과 설립 배경

사학 12도의 출발점은 고려 문종 대(11세기)에 벼슬에서 물러난 문신 **최충(984~1068)**이 자신의 집에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였다. 이 학교는 ‘9재학당’으로도 불리며 국자감과 동일한 유학 과목과 제술 교육을 진행했다. 최충의 사학이 큰 성공을 거두자, 권위 있는 유학자들이 각기 문도를 모집하게 되었고 개경에는 총 12개의 사학이 설립되어 사학 12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 학교의 명칭은 대부분 설립자의 호, 시호, 벼슬이름 등에서 따 왔다. 예를 들어 문헌공도(최충), 홍문공도(정배걸), 광헌공도(노단), 서원도(김무체) 등이 있다. 특히 창립자 중에는 당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시험관(지공거)을 역임했던 고위관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직접 문하생을 모으고 교육하는 구조가 사회 전반에 사교육 붐을 조성했다.
 

최충의 문헌공도와 사학의 시작

고려 사교육의 시초는 **최충(崔沖, 984-1068)**이 1055년(문종 9) 벼슬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집에 설립한 구재학당이었다. 최충은 낙성재, 대중재, 성명재, 경업재, 조도재, 솔성재, 진덕재, 대화재, 대빙재 등 9개의 방으로 구분하여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를 문헌공도 또는 9재학당이라 불렀다.
 
최충의 사학이 성공을 거두자, 다른 저명한 유학자들도 각기 문도를 모집하게 되어 총 12개의 사학이 설립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학 12도였다.

사학 12도의 구성

사학 12도는 설립자의 시호나 호, 벼슬 등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12도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1. 최충의 문헌공도
  2. 정배걸의 홍문공도
  3. 노단의 광헌공도
  4. 김상빈의 남산도
  5. 김무체의 서원도
  6. 은정의 문충공도
  7. 김의진의 양신공도
  8. 황영의 정경공도
  9. 유감의 충평공도
  10. 문정의 정헌공도
  11. 서석의 서시랑도
  12. 설립자 미상의 귀산도

사학 12도의 교육 방식과 특징

사학 12도는 과거 급제에 최적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하과(夏課)**라는 여름 특별교육이었다. 매년 음력 5월과 6월 사이의 50일 동안 조용한 사찰의 승방을 빌려 학생들을 합숙시키고, 자기 사학 출신의 과거급제자로서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아직 벼슬하지 못한 자를 교도로 삼아 후배들을 지도하게 했다.
 
주로 개경 근교의 귀법사와 용흥사가 하과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여기서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는 시 짓기 경쟁도 실시되었다. 촛불을 켜놓고 초가 타내려 가는 일정 부분에 금을 새겨 놓아 그 시간 안에 시를 짓게 하는 일종의 경시대회였다.
 
 

사학 12도와 국자감의 경쟁

사학이 설립되어 활성화됨에 따라 국자감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최충의 사학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063년(문종 17)에 국자감은 이미 폐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1102년(숙종 7)에는 당시 재상 소태보가 국학폐치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사학 12도는 단순한 사학이 아니라 과거와 직접 연결되는 국가적으로 공인된 학제였다. 사학에서만 수학해도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가능했고, 나아가 사학에서 수학하는 것이 과거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국자감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개경의 학생들은 대부분 사학에서 수학했으며, 귀족 자제들은 국자감보다 사학을 더욱 선호했다. 이는 과거의 고시관이 과거 합격 후 관직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같이 합격한 동기들이 향후 관직 생활에서 주요 인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 사교육 열풍의 사회적 배경

고려시대의 사교육 열풍은 단순히 12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중국 사신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민간 마을에 경관과 서사가 두 셋씩 늘어서 있으며, 백성들의 자제로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 지어 지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운다"고 했다.
 
이는 어린아이부터 청년층까지의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사설 교육기관에서 과거 준비를 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중국이 아닌 조그만 변방 국가에서 이렇게 사설 교육기관들이 성황을 이뤘다는 사실은 서긍에게 충격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올 정도로 특별한 상황이었다.
 
 

공교육의 침체와 사교육의 부상

고려시대에 과거 준비 교육이 사교육 기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당시의 공교육이 침체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학의 경우 국가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의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내면화한다는 명분으로 인해 학교에서 과거시험 합격을 위한 요령 위주의 교육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학교를 다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과거 합격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관학은 기피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과거 합격을 목표로 교육을 운영했던 사교육 기관으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사학 12도의 쇠퇴와 소멸

사학 12도는 고려 말기 충렬왕 이후 국학의 부흥과 성균관 중심의 교육 개혁 흐름에 밀려 점차 국자감의 예비 과정으로 약화되었다. 1352년(공민왕 원년)에 이색은 상소를 올려 향교와 동서 학당 학생을 12도에 올려 보내고 12도에서 다시 성균관에 올려 보내자고 하여, 사학 12도를 제도권 안에 완전히 편입시키고 그 위상을 국자감 아래에 두자고 제안했다.
 
최종적으로 사학 12도는 1391년(공양왕 3)에 폐지되었다. 이는 고려 말 성리학의 도입과 교육제도 개혁의 일환이었으며, 조선 건국 세력의 교육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학 12도와 사교육 열풍은 한국 교육사에 있어 실력과 인맥, 입신의 출발점으로 교육이 기능했던 원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늘날 사교육과 입시 중심 한국 사회의 뿌리가 이미 천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교육열풍의 역사적 의의

고려시대의 과거제도와 사학 12도로 대표되는 사교육 열풍은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과거제는 신분적 특권 대신 실력을 기준으로 관인층을 선발함으로써 학문 소양을 중시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둘째, 사학 12도는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고려의 문인 관료들을 양성하고, 이들이 정치 세력화하여 인맥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고려 후기 문벌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셋째, 고려시대의 교육 경쟁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사교육 열풍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과 놀랍도록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족집게 과외, 모의고사, 합숙 교육 등 현대적 사교육 기법들이 이미 900여 년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한국인의 교육열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고려시대 과거제도와 사학 12도의 사교육 열풍은 단순한 교육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교육 문화와 인재 등용 시스템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현상이었다. 이는 능력주의와 교육 경쟁이라는 한국 사회의 특징이 천 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증거라 할 수 있다.
 
 

**고려 사학 12도의 중심 인물과 그 약력, 역할을 정리

 
1. 최충(崔沖, 984~1068) - 문헌공도(文憲公徒) 설립자

  • 주요 경력: 문신, 문하시중(정승 격), 도병마사, 국사 수찬관, 귀족 관료.
  • 역할: 벼슬에서 물러난 후 개경에 9개 재(齋)를 둔 사립 학교 '문헌공도'(일명 9재학당)를 세움. 학문(경학) 중심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 고려 사립학교의 시초이자 사학 12도 체제의 모델이 됨.
  • 특이 사항: '해동공자'라 불릴 만큼 유학 진흥과 교육 혁신에 크게 기여, 12공도 중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었음.

2. 정배걸(鄭倍傑) - 홍문공도(弘文公徒) 설립자

  • 주요 경력: 예부상서, 중추원사, 지공거(과거시험 주관관), 문과 장원 급제.
  • 역할: 개경 남문밖에 '홍문공도'(일명 웅천도) 설립, 과거 응시자를 위한 교육 제공. 사학의 성공 사례이자 최충의 뒤를 이은 과거 준비 전문 사학의 대표.
  • 특이 사항: 과거에 큰 영향력을 미치며 많은 합격자 배출로 명성을 얻음.

3. 노단(盧旦) - 광헌공도(匡憲公徒) 설립자

  • 주요 경력: 문관, 시어사, 한림학사, 예부상서, 좌우복야, 참지정사, 지공거(과거시험관).
  • 역할: 1086년(선종 3) 벼슬을 그만두고 광헌공도 설립, 교육·후진양성에 전념, 다수 인재 배출. 공헌을 인정받아 사후에 '광헌'이라는 시호를 받음.
  • 특이 사항: 문벌귀족 출신으로, 지방에서도 학문적 기반과 교육 문화 형성에 이바지함.

 
이 외에도 서원도(김무체), 남산도, 정경공도, 충평공도 등 기타 설립자들이 있으나, 위 세 인물이 사학 12도 발전과 고려 사교육 열풍의 중심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이들은 모두 관료 출신으로 실제 과거시험 주관 경험이 있었고, 자신들의 사숙을 수험생 인맥과 출세의 길로 만든 시대적 리더였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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