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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승려들의 기이한 이야기 : 왕사와 국사의 시대

이모는오늘도 2025. 9. 22. 12:24

고려시대의 불교 국가 체제는 단순히 국가 이념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흥미로운 일화들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려인들의 불교에 대한 진솔한 믿음과 때로는 지나친 집착, 그리고 승려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고려 시대 승려들의 기이한 이야기 : 왕사와 국사의 시대 / 대각국사 의천 : 이미지 출처 불교신문

대각국사 의천의 기이한 탄생 설화

문종의 넷째 아들인 의천에게는 신비로운 탄생 설화가 전해집니다. 의천이 태어났을 때 아기가 전혀 울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리 해도 아이가 울음소리를 내지 않자 문종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한번 찾아가 봐라".
 
신하들이 그 모종의 소리를 찾아가니 서해바다 건너 중국 대륙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서해바다를 건너가서 항주의 경호 호숫가에 있는 한 사찰에서 한 스님이 목어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고려 관리들이 사정을 이야기하고 고려로 돌아가 도와달라고 요청하니, 그 중국 스님이 "이상한 일이다"라고 하면서도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 중국 스님이 고려로 와서 울지 않는 왕자 앞에서 무릎을 꺾고 합장을 하며 절을 하자, 비로소 그 아기가 웃음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의천이 범상치 않은 영성을 타고났으며, 중국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암시하는 설화로 여겨집니다.
 

의천의 무모한 송나라 밀항 사건

의천의 송나라 유학은 고려사상 가장 대담한 불교 관련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1084년 의천은 송나라 정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렸습니다. 하지만 의천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만 데리고 1085년 송나라로 떠났습니다.
 
왕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 급히 관리와 제자 낙진, 혜선, 도린 등을 보내 수행하게 했습니다. 의천은 밤중에 비밀리에 배편으로 송나라에 입국했지만, 소문이 퍼지자 송나라 철종은 특별히 주객낭중인 양걸을 보내 영접하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의천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불교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진표 스님의 극한 수행과 기적

고려시대에 전해지는 진표 스님의 이야기는 불교 수행의 극한을 보여줍니다. 진표 스님은 미륵불을 만나기 위해 매우 열심히 기도했지만 나타나지 않자, 절벽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다치지 않고 누군가가 아래에서 받아주었는데, 바로 지장보살이 나와서 받아주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진표 스님은 만족하지 못하고 "나는 미륵불을 만나야 되겠다"며 다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미륵불이 나타나지 않자 다시 또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극한 수행 방식은 고려시대 불교의 열렬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때로는 지나친 면도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나옹왕사의 홍건적 침입 시 태연한 대응

고려 후기 나옹왕사는 홍건적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놀라운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왕마저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개경이 아우성치는 상황에서도, 나옹 스님은 성당에 나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수십 마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도적의 괴수가 성당 문을 우악스럽게 열고 들어왔습니다. 나옹 스님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중국말로 "어서 오시지요"라고 대했습니다. 뜻밖의 중국말 인사에 의표를 찔린 괴수는 힐끔 스님을 쳐다보았고, 나옹 스님은 여전히 태연한 음성으로 "어떤 일로 이 산속까지 오셨는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날 밤 나옹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토지신이 나타나 "화상은 이곳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대중이 흩어지면 도적은 반드시 이 절집을 없애고 말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토지신좌를 가보니 꿈에 나타났던 신의 얼굴과 똑같았다고 전해집니다.
 

공민왕 시대의 문수회 대규모 의식

공민왕이 개최한 문수회는 고려시대 불교 의식의 장관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공민왕이 연복사에서 문수회를 크게 베풀 때, 불전 한가운데에 채색 비단을 연결시켜 수미산을 만들었습니다.
 
산을 빙 둘러 촛불을 켰는데, 촛불의 크기는 기둥만 했고 높이는 10척이 넘어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실로 만든 꽃과 비단으로 만든 봉황의 광채가 눈부셨으며, 폐백은 채색 비단 16속을 사용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승려 3,100명을 뽑아 수미산을 돌아다니게 했는데 범패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으며, 일을 맡아본 사람이 무려 8,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입니다. 공민왕은 신돈과 함께 수미산 동쪽에 앉아 양부의 관원을 거느리고 부처에게 경배했으며, 승려들에게 밥을 먹일 때는 손수 금로를 받쳐 들고 향을 피우며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승려 신돈의 파격적 개혁과 비극적 최후

고려 말 신돈의 이야기는 불교 승려가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일어난 극적인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영산현 출신의 매골승이었던 신돈은 생불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민왕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돈은 평소 마른 몸매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사철 누더기 옷을 입고 살았는데, 불당을 찾는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서 신자들이 감동했습니다. 여자들은 신돈을 신승이나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찬미했고, 백성과 노비들은 성인이 오셨다고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신돈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1371년 신돈은 처형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는데, 이는 승려가 세속 권력에 개입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무당의 신기한 예언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함께 무속 신앙도 활발했는데, 특히 등주 성황사의 무당이 행한 예언이 유명했습니다. 함유일이 삭방도 감창사가 되었을 때 등주 성황신이 자주 무당에게 강신하여 기이하게도 국가의 화복을 맞혔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인종 24년(1146)에 왕이 병들자 무당이 죽은 척준경의 원혼이 빌미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무당의 말에 따라 왕은 척준경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추복하고 그 자손을 불러 벼슬을 주었습니다. 이는 무당의 종교적 권위가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고려 말 승려들의 세속화와 갈등

고려 후기로 갈수록 승려들의 세속화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원을 장악하려는 주지쟁탈이 심했고, 종파 간에 사원을 둘러싼 분쟁이 심하여 하루아침에도 사찰의 종파가 바뀌는 일이 많았습니다.
 
몽고풍의 풍습이 유입되면서 승려의 세속화가 가속화되었고, 부원세력과 결탁한 승려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승려의 직을 얻기 위해 승과시험을 보지 않고 국왕의 측근에게 뇌물을 써서 자리를 얻었다는 기록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상황은 충선왕이 "모든 불교계가 이익을 취하려는 소굴"이라고 비판할 정도에 이르렀으며, 결국 조선 건국 후 숭유억불 정책의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 일화들의 의미

이러한 일화들은 고려시대 불교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린 생활 문화였음을 보여줍니다. 의천의 탄생 설화나 진표 스님의 극한 수행, 나옹왕사의 담대한 대응 등은 고려인들이 불교를 얼마나 신비롭고 신성한 것으로 여겼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동시에 신돈의 권력 남용이나 고려 말 승려들의 세속화 문제는 종교와 권력이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불교 국가였던 고려가 결국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불교 관련 일화들은 종교적 열정과 인간적 한계, 신앙심과 세속적 욕망이 공존했던 당시의 복잡한 현실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적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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