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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어둠의 그림자, 한국의 '마녀사냥'을 엿보다

이모는 2025. 8. 16. 22:21

중세 유럽의 대표적 사건인 마녀사냥은 악마 숭배나 흑마법 등의 혐의를 근거로 무고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처형당한 광기 어린 역사적 비극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역사 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마녀사냥과 같은 사건이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한국 역사에서 마녀사냥과 같은 대규모의 종교적 박해나 집단적 광기를 쉽게 떠올리지 못합니다. 유교를 근간으로 한 사회였기 때문에 서양의 종교재판과 같은 형태는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마녀사냥'은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비난하고 처벌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 속에도 충분히 '마녀사냥'이라 불릴 만한 어둡고 잔혹한 사건들이 존재했습니다.
 
 

역사 속 어둠의 그림자, 한국의 '마녀사냥'을 엿보다 / 이미지 출처 : Unsplash

 
 
 

중세 유럽과 한국 역사 속 ‘마녀사냥’ 개념 차이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은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전 유럽을 강타한 종교적, 사회적 공포와 광기가 만들어낸 현상입니다. 악마와 계약을 맺고 마법을 쓴다는 ‘마녀’ 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해 자백을 강요하고, 화형 등 처형을 가했으며 피해자의 대부분은 여성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특히 《마녀의 망치》라는 지침서가 마녀사냥을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마녀 의심자는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가문이 파탄나는 등 경제적 이익과 권력 유지 도구로도 악용되었죠.
 
한국의 조선 시대에는 유럽식 ‘마녀’ 혐의에서 파생된 집단적 광기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유교적 가부장제가 엄격히 지배하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나 여성, 특정 가문에 대해 ‘저주’나 ‘주술’ 등의 혐의로 탄압하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신숙녀 사건’이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데, 이 사건은 국가 권력과 가문 권력, 그리고 당시의 사회적 긴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조선판 마녀사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는 마녀사냥처럼 대규모 또는 공식적인 재판이나 고문 중심이 아니라도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거나 권력 유지를 위한 희생양 만들기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집니다.
 

신숙녀 사건의 상세 기록

  •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와 승정원일기, 그리고 학술 논문에 따르면, 신숙녀는 1628년 시댁에서 쫓겨난 뒤, 1631년 시댁 일족이 연달아 사망하자 저주 살인죄로 고발당했습니다. 조정은 4차례 재판과 뒤이은 별건 수사까지 실시했으나, 신숙녀의 혐의를 인정할 만한 직접적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격쟁과 권력 투쟁 속에서 그녀는 옥중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녀를 고발한 시가족 10여 명 이상이 무고죄로 처벌당했습니다.
  • 당시 고문으로 신숙녀의 하인들이 죽는 등 사회적 파장이 컸으며, ‘강상범죄’의 무고인 경우 반드시 엄벌해야 한다는 형법 원칙이 관철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저주 살인’ 실제 판례

  • 세종 시대 기록에 따르면, 귀신에게 빌거나 주문·저주로 살인을 꾀한 경우가 실제로 처벌됐습니다. 예를 들어, 1438년 청주 사람 건지중은 자신의 형의 재산을 빼앗으려 저주와 공모로 살인을 저질러, 능지처참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 저주 인형을 만들어 상대를 저주하고, 실제로 죽음까지 이른 사례도 실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경우 주모자와 관련자들은 참수, 교수형, 능지처참 등 중형을 받았습니다.

 

무고한 이들의 희생, '무고사건'과 '역모사건'

조선시대는 유교적 질서와 왕권을 확립하려는 치열한 권력 다툼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흔하고 강력한 수단은 바로 '역모(反逆)'죄였습니다. 역모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죄였기 때문에 관련자들은 모두 참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모사건의 배후에는 종종 사회적 불안을 틈탄 '무고(誣告)'가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된 사육신 사건입니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단종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습니다. 사육신은 물론이고, 이들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이 역모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조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역모'라는 프레임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마치 유럽의 종교재판관들이 '마녀'라는 프레임으로 무고한 이들을 처형했듯이 말입니다.
 
또한, 연산군 시기의 갑자사화(甲子士禍)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자, 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잔인하게 처벌했습니다. 단지 과거에 폐비 윤씨를 처벌하는 데 찬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죽은 사람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자손들까지도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왕실에 대한 불경'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잔혹한 집단 숙청이었습니다. 연산군의 광기 어린 행태는 마치 마녀사냥의 광기와도 같이 사회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미신과 공포가 만들어낸 비극, '귀신'과 '요괴'

유럽의 마녀사냥이 '악마'와 '악령'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귀신'과 '요괴'에 대한 미신이 비극을 낳기도 했습니다. 물론 서양처럼 대규모의 집단 처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특정 사건의 원인을 미신적인 존재에게 돌리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희생양 삼는 사례들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조선 중기, 숙종 시대에 발생한 '무고의 옥'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무당을 불러 저주 의식을 행했다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숙종이 장희빈을 폐위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명분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단순히 무당을 고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궁인과 관련자들이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떠났습니다. 비록 '마녀'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저주'와 '미신'이라는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 상대를 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마녀사냥과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단'과 '사교'에 대한 탄압, 천주교 박해

서양의 마녀사냥이 '이단'을 척결하려는 종교적 광기에서 비롯되었듯,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 박해라는 형태로 비슷한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조선 사회는 유교를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는 '사교(邪敎)'이자 '이단'으로 낙인찍혔습니다.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천주교도 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개인의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몰려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이는 비록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적 불안과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을 '이단'이라는 프레임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마녀사냥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마녀사냥'에 대한 결론

물론, 한국 역사에서 유럽의 마녀사냥처럼 '마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마녀로 지목된 이들을 불에 태워 죽이는 형식의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이용하여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고, '집단적인 광기'를 통해 그들을 잔혹하게 처벌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 속에도 분명히 '마녀사냥'이라 불릴 만한 어두운 그림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역모'라는 프레임을 씌우거나, 사회 혼란의 원인을 '미신'이나 '이단'으로 규정하여 특정 집단을 탄압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유럽의 마녀사냥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한국사 마녀사냥의 의미를 이해하고,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집단적 마녀사냥'과 '가짜 뉴스'의 광기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의 ‘마녀사냥’ 표현과 의미

오늘날 ‘마녀사냥’이라는 표현은 역사적 사실을 넘어 정치, 사회, SNS상의 집단적 비난이나 의혹 제기 현상을 가리키는 메타포로도 사용됩니다. 일례로, SNS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과도하게 공격하고 매장하는 집단 심리 현상을 표현할 때 쓰입니다. 이는 과거 역사 속 억울한 희생자를 떠올리게 하며, 집단 공포와 편견이 얼마나 개인과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지 경고하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결론: 한국 역사 속 ‘마녀사냥’은?

  •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은 종교적 갈등과 사회적 광기가 결합된 대규모 집단 학살 사건이었고, 공식적인 마녀재판과 고문, 처형이 중심이었다.
  • 한국 역사에는 ‘마녀’라는 개념보다는 ‘저주’, ‘주술’ 혐의로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가 탄압받는 사례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17세기 조선 신숙녀 사건이 있다.
  • 이러한 사건은 당시 사회 질서 유지와 권력 구조 속에서 특정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집단 심리 현상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 오늘날 ‘마녀사냥’은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사회적 비난과 편견이 과도하게 표출되는 현상을 비유하는 용어로도 널리 쓰인다.

이처럼 한국사에서는 유럽과 같은 구조적 마녀사냥은 적지만, 대체로 부족한 과학적 인식과 사회적 긴장이 결합해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 삼는 일은 존재했으며, 이를 통해 당시 사회의 억압과 갈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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