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조선 시대의 퇴마 의식: 현실과 신앙이 교차하는 한국 오컬트의 원형

이모는 2025. 8. 1. 19:05

조선 시대는 유교가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은 시기였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은 각종 재난, 질병, 불운, 그리고 설명 불가한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달래기 위해 다양한 퇴마 의식을 실행했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퇴마 의식이 실제로 어떻게 행해졌는지, 누가 퇴마를 담당했으며, 어떤 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지 깊이 있게 살펴본다.
 
 
 

조선 시대의 퇴마 의식: 현실과 신앙이 교차하는 한국 오컬트의 원형

 
 

1. 조선 시대에 '퇴마 의식'은 무엇이었을까?

‘퇴마’라는 단어는 최근 들어 대중매체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오히려 '벽사(辟邪)', '귀신을 물리친다(攘邪)', 혹은 '축귀(逐鬼)'와 같은 표현이 주로 쓰였다. 조선인은 악귀, 잡귀, 원혼 등의 ‘나쁜 기운’을 인간의 삶과 건강, 복에 피해를 입히는 존재로 생각했고, 이를 몰아내는 각종 의식을 통칭해 퇴마라 칭할 수 있다.
 
일화:
조선 세종 때, 경기도의 한 마을에 흉년과 역병이 돌자, 마을 사람들은 ‘귀신의 저주’로 여기고 부적을 붙이며 밤마다 집 안을 향해 쌀을 뿌려 귀신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이는 《세종실록》에서도 "백성들이 장마철 귀신이 들어온다며 부적을 구해 집에 붙이고, 밤새 장도나 방망이로 기둥을 친다"는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2. 퇴마 의식을 집행한 이들 – 무당, 승려, 도사

  • 무속인(무당)
    무당은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인 퇴마 주체였다. 병이 나지 않거나 집안에 불운이 연속될 때, 사람들은 ‘악귀가 붙었다’고 생각하고 무당을 초청해 굿을 열었다. 대표적 의례로 진오귀굿, 씻김굿 등이 있다. 이 굿을 통해 귀신의 한을 풀어 주고 올바르게 저승으로 떠나보냈다.
    숙종 때 명당으로 소문난 경상도의 한 집안에서 사망자가 잇달아 생기자, 무당 ‘월화랑’이 초청되어 진오귀굿을 거행했습니다. 굿이 끝나자 이상하게 병이 멈추고 평온이 찾아왔다는 소문이 관아까지 퍼졌고, 결국 지역 사또가 "무속에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를 내린 일도 있습니다.
  • 불교 승려
    불교에서는 영혼이 이승에 남아 해를 끼치는 걸 막기 위해 '천도재'라는 의식을 집행했다. 승려가 창경궁이나 사찰 등에서 경문을 외우고 음식과 공양을 귀신에게 바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 후기 억불정책 속에서도, 경상감영에 역병이 돌자 승려를 몰래 불러 천도재를 열었습니다. 주민들은 승려의 목탁 소리에 몰래 귀 기울였다고 전해집니다.
  • 도사와 유학자
    도가에서는 부적, 주문, 방술(주술적 의례), 기문둔갑 등의 방식을 통해 귀신을 쫓았다. 흥미로운 점은 표면적으로 유교를 따르던 양반층이나 관리계급도 속으로는 부적을 붙이거나 무속인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는 ‘무속을 멀리하라’는 조항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다양한 퇴마 의식을 경험했다.
    유생 신분의 박문수는 사가에서 이상한 환청과 그림자가 반복되자, 몰래 도사를 불러 ‘기문둔갑’ 주문과 부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평소 “유학자는 이단을 배척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실제로는 잠시 신앙심에 기댔다고 하죠.

 

3. 대표적인 퇴마 의식의 실제 사례

  • 굿(巫祭·굿놀이)
    무당이 집안이나 마을에서 제를 올리고, 북과 꽹과리를 울리며 춤과 노래로 신을 달랜다. 때로는 집안에 뭔가 문제가 생기거나 원인 불명의 질환, 불운한 사건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규모 마을굿을 벌이기도 했다. 굿에서는 유교의 예법과는 반대되는 ‘혼돈’, ‘질서의 파괴’(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contact zone)라는 주제도 엿볼 수 있다.
  • 조선 말기 평안도에서는 큰 사고 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진오귀굿'을 벌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굿판이 한창 무르익던 때 갑자기 바람이 돌면서 촛불이 모두 꺼졌고, 무당이 "귀신이 분노했다"며 더 큰 북소리와 함께 굿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굿이 끝난 뒤 동네의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전해집니다.
  • 부적과 주문, 실물적 도구의 사용
    황철 퇴마사 이야기에 따르면, 붉은 부적을 병에 붙이고 주문을 세 번 외운 뒤, 집안에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난 사례가 조선 기록에 남아 있다. 반딧불 같은 빛이 모여 뼛가루와 두개골을 형성하며 귀신을 깨끗이 몰아냈다고 한다.
  • 《동국문헌비고》에는, 함경도 어느 집에서 “밤마다 아이들이 격렬하게 울다가 기절하듯 잠든다”는 괴이 현상이 이어지자, 도사가 붉은 글씨로 써준 부적을 대문에 붙이자 그날부터 아이가 편안히 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포(砲)’ 등 화기 이용
    특이하게도 귀신이 출몰하는 집을 화포(대포)로 날려버리는 과감한 퇴마법도 실제로 있었다. 이는 불(火)이 악귀를 몰아낸다는 관념과 결합된 실천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있다. 화기의 강력함을 신비로운 힘과 연결짓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 영조 연간, 한양의 한 기와집에 폐가가 되도록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자, 관헌이 실제로 ‘화통’(작은 대포)을 앞마당에 쏘아댑니다. 이후 더 이상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 일화는 《승정원일기》 등에도 비슷하게 전해집니다.
  • 불교·도가 융합 의식
    불교 경문과 도가 주문을 혼합해 치러진 퇴마 의례도 존재한다. 이처럼 조선의 퇴마 의식은 다양한 종교문화가 융합돼 발전했다.
  • 한 임금의 후궁이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자, 무녀와 승려, 도사가 모두 모여 부적, 경문, 주문을 한꺼번에 쓰는 대규모 퇴마 의식을 거행합니다. 현장에는 유생들도 참관하여 각종 의식이 동시에 진행되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됐으며, 당일 후궁의 병세가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4. 사회의 그림자에서 주류로: 조선 퇴마 의식의 이중성

조선 유교 사회의 이념상 무속과 퇴마 행위는 억압되고 사회적 천대로 이어졌다. 초기에 궁궐이나 공식 자리에서도 무속 의례가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무당은 도성(서울) 바깥으로 쫓겨나고, 천민 신분으로 분류됐다. 그럼에도 백성과 사대부 가문 모두 굿이나 부적, 기복 의식을 꾸준히 행했다. 일례로 영조실록에는 귀신이 들렸다는 이유로 무속인을 불러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기록이 있으며, 유교적 표면질서와 현실적 신앙 사이의 간극을 엿볼 수 있다.
 

  • 일화:
    영조실록에는 어느 관리가 “무당을 불러 귀신을 쫓았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질책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한 대감이 집안에 이상한 소리가 반복되자 은밀히 무당을 불러 굿을 지내고, 아침에는 아무 일 없던 듯 성리학 예법대로 조상을 모셨다고 전해집니다.

 
 

5. 퇴마 의식에 담긴 의미와 오늘날의 재해석

조선 시대 퇴마 의식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안전장치였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질병, 자연재해 등에서 삶의 위로와 질서,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집단 심리의 표출이었다. 현대 한국의 대중문화, 드라마, 영화에서 퇴마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또한 이 근본적 상상력, 문화적 뿌리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방영된 ‘귀궁’ 같은 드라마는 전통 오컬트와 현대적 해석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준다.
 

  • 일화:
    조선 말 일부 양반가에서는 자녀가 아플 때 유학자의 권유로 약을 지어 먹이면서도, 한편으론 '돌림굿'이나 '부적 씻기기' 등 무속 의식을 병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마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둘 다 믿어야 안심된다”는 말이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조선의 퇴마 의식은 단순한 토속 신앙이나 미신이 아니라, 한민족의 심성과 집단 무의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유교의 공식 이념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무속과 퇴마의 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는 두려움·기원·초월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자 한국 오컬트 문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퇴마 의식은 실존했고, 다양한 일화와 기록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두려움, 신앙, 사회 이념, 현실적 욕망이 복합적으로 엮여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현재 생활에서 '심리 방패'처럼 오컬트·퇴마 문화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현상과도 통합니다.


  • 이 글은 조선 시대의 퇴마 문화에 대한 객관적 사례와 사료적 근거, 그리고 오늘날 문화적 의미까지 균형 있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