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법률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복잡한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하고, 소송 절차를 진행합니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 법률 지식이 전무했던 조선시대의 서민들은 어떻게 억울함을 풀었을까요? 놀랍게도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의 변호사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던 직업이 있었습니다. 바로 **'외지부(外知部)'**입니다.
외지부, 즉 '바깥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들은 공식적인 법률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복잡한 법률 용어와 절차에 무지한 서민들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변호사라 불리는 외지부의 역할과 함께, 이들이 활약했던 흥미진진한 조선시대 재판 풍경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1. 법률 지식의 희망, '외지부'는 누구인가?
조선시대는 법치국가였지만, 법률 체계는 복잡했고 대부분의 백성은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특히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같은 법전은 한자로 되어 있어 일반 서민들이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죠. 이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재판관에게 제출하는 **소장(訴狀)**을 작성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외지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주로 글을 아는 중인(中人) 계층이나 몰락한 양반들 중에서 법률 지식과 글솜씨를 겸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주된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 소장(訴狀) 대필: 억울한 사정을 듣고 재판관이 납득할 수 있도록 논리적인 소장을 대신 작성해주는 것이 외지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소장이 얼마나 잘 쓰였는지에 따라 송사(訟事)의 향방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 법률 자문: 재판 절차나 상대방의 주장, 예상되는 판결 등에 대해 의뢰인에게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 변론 대행: 때로는 의뢰인을 대신해 법정에서 직접 변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처럼 체계적인 변호 활동은 아니었지만, 서민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공식적인 직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수료를 받고 일했습니다. 그 수수료는 쌀, 돈, 심지어는 땅으로 받기도 했으며, 이 덕분에 일부 외지부는 큰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의 존재는 법치주의 사회에서 법률 지식의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는 중요한 안전망 역할을 했습니다.
외지부의 등장과 처벌 기록: "조선왕조실록"
'외지부'와 비슷한 역할을 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소장 대필을 넘어 송사를 전문적으로 중개하고 부추기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 사례: 조선 후기 숙종 3년(1677년)의 기록에 따르면, "법을 잘 안다고 자처하며 소송을 대신 써주고 송사를 꾀하는 무리들"에 대한 탄압이 있었습니다. **한위겸(韓煒謙)**이라는 인물이 공문서까지 위조하면서 소송을 대리한 사실이 적발되어 처벌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한위겸이 단순히 소장 대필을 넘어, 소송 과정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고 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들을 '송옥 대필가(訟獄代筆家)'라 부르며, 법을 어지럽히는 존재로 규정하고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 의의: 이 기록은 외지부와 같은 존재들이 이미 조선 사회에 만연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국가가 이들을 법률 전문가로 인정하기는커녕, 사회 질서를 해치는 '불순 세력'으로 보고 탄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외지부가 공식적인 변호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공식적인 존재였음을 명확히 해줍니다.
2. 소장(訴狀) 한 장의 힘, 조선시대 송사(訟事)의 시작
조선시대의 재판, 즉 **송사(訟事)**는 오늘날과 달리 소장을 제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은 먼저 소장을 작성해 지방의 수령(守令), 즉 사또에게 제출해야 했습니다.
이 소장은 형식과 내용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육하원칙에 따라 사건의 경위를 명확히 밝히고, 법률 조항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야 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서민들에게는 이 과정 자체가 넘기 힘든 거대한 벽이었죠. 외지부의 도움 없이는 소장 한 장조차 제대로 제출할 수 없었기에, 이들은 자연스럽게 송사 해결의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외지부가 작성한 소장은 수령에게 제출되었고, 수령은 소장의 내용을 검토한 후 재판을 열지 여부를 결정했습니다. 소장의 내용이 부실하면 각하되거나, 심지어 소장 작성자가 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기에, 외지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했습니다.
송의 귀재, '송사 대가'의 활약: "승정원일기"
복잡한 송사에서 논리적인 소장 작성 능력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 때문에 글솜씨와 법률 지식이 뛰어난 소송 대필가는 의뢰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사례: 영조 21년(1745년)의 **『승정원일기』**에는 한 관리가 "세간에는 소송으로 유명한 전문가가 있어, 그들의 손을 거친 소장 한 장으로 송사가 뒤집히는 일이 허다합니다."라고 보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은 '송사 대가(訟事大家)'라 불리며, 여러 지방을 떠돌며 사건을 맡아 처리했다고 합니다.
- 의의: 이 사례는 외지부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단순한 서기(書記)가 아니라, 사건의 핵심을 꿰뚫고 상대방의 허점을 공략하는 '전문가'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송사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사회적 파급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또 앞에서 펼쳐진 '조선시대 재판'의 현실
마침내 재판이 열리면, 의뢰인과 외지부가 함께 법정에 서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재판을 주관하는 이는 지방관인 수령이나, 중앙에서는 포도대장, 의금부 관원 등 다양한 관직자들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재판은 오늘날처럼 변호사와 검사가 공방을 펼치는 '대심(對審)'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관료가 원고와 피고의 진술을 듣고 직접 진실을 파헤치는 '심문(訊問)'에 가까웠습니다. 재판관인 수령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며, 원고와 피고는 수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때 외지부는 재판관 앞에서 직접 나서서 변론하기보다는, 의뢰인의 뒤에서 증거와 논리를 조언하거나, 사전에 제출한 소장이 재판의 주요 증거물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재판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바로 **고문(拷問)**입니다. 명백한 증거가 없거나 피고가 죄를 부인할 경우, 죄를 자백하게 하기 위해 고문이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억울한 자가 거짓 자백을 하는 경우도 많아, 외지부와 같은 조선시대 법률가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고문이 시작되기 전에 사건의 논리를 명확히 정리하여 의뢰인의 억울함을 입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분 사회의 벽을 넘으려 했던 기록: "추안급국안(推案及國案)"
외지부의 존재는 신분 사회에서 법의 보호를 받기 어려웠던 노비나 서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들은 외지부의 도움을 받아 힘 있는 양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 사례: 노비가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추안급국안』**이나 **『고려사』**와 같은 사료에는 노비가 주인에게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곤장을 맞았을 때, 몰래 외지부를 찾아가 소장을 작성하여 관아에 제출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조선 중기, 안씨 가문과 송씨 가문이 수십 년에 걸쳐 '송익필이 노비였는지 양반이었는지'를 다투는 소송을 벌였습니다. 이 소송은 법률 논리가 매우 복잡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당시의 기록을 보면 "소장 내용의 논리가 정교하여 일반 서민의 글솜씨가 아니다"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 의의: 이 사례는 외지부가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직업을 넘어, 사회적 약자들이 법의 심판대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대부분의 소송에서 노비가 승소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들의 존재 덕분에 약자들이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법률 체계의 한계 속에서도 나름의 '정의'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4. 현대의 변호사와 '외지부'의 결정적 차이
오늘날의 변호사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자격증을 소지하고, 의뢰인의 법적 대리인으로서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변론을 펼칩니다. 이들은 증거 제출, 논리적 공방, 판결 항소 등 다양한 법적 절차를 전문적으로 처리합니다.
그러나 외지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공인 자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고, 재판관의 심기를 거스르면 오히려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법률 대리인이라기보다는, 복잡한 법률 체계 속에서 길을 잃은 서민들을 위한 '길잡이'에 가까웠습니다.
결론적으로, 외지부는 비록 현대적인 의미의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조선시대 신분 사회의 한계와 복잡한 법률 제도 속에서 억울한 백성들의 권리를 지키려 노력했던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법치주의의 역사 속에서 약자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가려 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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