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조선시대 호랑이 : 위험과 상징의 이중적 존재

이모는 2025. 7. 29. 13:44

조선시대 호랑이: 위험과 상징의 이중적 존재

조선시대 호랑이는 단순한 야생동물을 넘어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호랑이는 산을 지배하는 '산군(山君)'으로 여겨졌으며, 동시에 위험한 포식자로서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호랑이는 이러한 이중적인 이미지 속에서 조선 사회와 문화 전반에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조선시대 호랑이 : 위험과 상징의 이중적 존재 / 호작도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호랑이 피해와 사회적 문제 '호환'

조선시대 호랑이 피해는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였으며, 이를 '호환(虎患)'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영조 10년(1734년) 한 해에만 전국에서 약 140명의 사망자가 호랑이로 인해 발생했다고 전해집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영조 30년에 경기도에서만 한 달 동안 무려 120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는 기록입니다.
태종 16년(1416년) 겨울에는 한양 외곽에 크고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 수도권 전체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호랑이는 유난히 대담하고 공격적이어서 주민들 사이에 광범위한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태종은 최고의 사냥꾼들과 군인들을 동원하여 몇 주간의 대대적 추격전을 벌인 끝에야 겨우 잡을 수 있었습니다.
중종 때에는 호랑이가 해가 갈수록 많아져 동대문 근처까지 나타났고, 금천·과천 지방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일이 생기자 경기관찰사로 하여금 호랑이를 잡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선조 4년에는 고양 일대에 흰 이마를 가진 백액호(白額虎)가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 무려 400여 마리를 죽이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착호군(捉虎軍)'이라는 호랑이 사냥을 담당하는 전문 부대를 두어 호랑이 사냥을 적극 장려했습니다. 착호군은 사냥 실적에 따라 사냥꾼의 신분을 올려주고 세금 혜택을 주기도 했으며, 사냥 시에는 마을 주민을 몰이꾼으로 동원하는 권한도 가졌습니다.
 

전문화된 호랑이 사냥과 권위의 상징

호랑이 사냥은 단순히 위험 동물을 제거하는 활동을 넘어 용맹과 권위의 상징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활, 화살, 그물, 함정 등을 이용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방법으로 호랑이를 잡았는데, 이는 호랑이의 위협이 사회적 존립과 안정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조선 왕들 중에서도 세조는 호랑이 사냥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인물로 기록됩니다. '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세조는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를 제거한 후에도 실제 호랑이 사냥에 집착했습니다. 세조 10년 5월 26일, 녹양목장에 호랑이가 침입하여 말을 해치자 세조는 직접 출동하여 호랑이를 잡고 의기양양하게 환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세조는 호랑이 사냥을 위해 특수 화살인 '호전(虎箭)'까지 새로 만들었으며, 1462년 북악산에 표범이 나타났을 때는 화포까지 동원하는 대대적인 사냥작전을 펼쳤습니다. 이때 세조는 평소 애용하던 호랑이 가죽 외투를 입고 직접 현장을 지휘했으며, 총통위로 하여금 대포를 쏘게 하여 표범을 몰아낸 끝에 동생 임영대군이 활로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반면 연산군은 더욱 엽기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는 호랑이와 곰을 궁궐의 금원에 풀어놓고 활을 쏘아 오락으로 삼았으며, 각 주군으로 하여금 맹수를 진상하게 하여 산 호랑이와 곰을 메고 오는 자들이 길을 잇달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충언을 올린 환관 김처선을 호랑이 굴에 던져 처형하려 했으나, 신기하게도 호랑이가 그를 잡아먹지 않아 결국 다른 방법으로 살해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궁궐을 습격한 호랑이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궁궐까지 침입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태종 5년 7월 25일에는 호랑이가 경복궁 근정전 뜰에까지 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선조가 주로 거처했던 창덕궁에는 호랑이 출몰이 특히 잦았는데, 선조 40년에는 창덕궁 안에서 호랑이가 아예 새끼를 낳아 번식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영조 때는 궁궐 호랑이 침입이 절정에 달해 총 3차례나 발생했습니다. 경복궁에 2번, 영조가 주로 거처했던 경희궁(당시 경덕궁)에 1번 호랑이가 들어왔습니다. 심지어 호랑이가 나라의 제사에 쓸 소나 돼지 등 제물을 보관하는 '전생서(典牲署)'에 들어가 돼지를 물고 가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정조 1년 9월 19일에는 호랑이가 궁궐 밖 군보(軍堡)의 병졸을 물어가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정조는 도성 주변에서 호랑이나 표범이 은신할 만한 숲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했으며, 일부 신하들이 능침 주변의 나무는 베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백성들의 안전'을 내세워 벌목을 강행했습니다.
 

민간의 호랑이 영웅들

조선왕조실록에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놀라운 이야기들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삼척의 노비 후일의 아내 '응옥'의 이야기입니다. 1711년(숙종 37년)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자, 응옥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남편의 시신을 되찾았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녀에게 열녀문을 세워주려 했으나, 나중에 재혼한 사실이 알려져 계획이 취소되었다는 후일담도 전해집니다.
정조 13년에는 원주에 사는 윤장금이라는 사람의 집에 대형 호랑이가 침입해 아버지를 물어갔는데, 장금이가 추격하여 어머니와 함께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장금이는 호랑이의 간을 쪼개고 피를 마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변에 사는 유학자 이종현의 며느리 '현씨'도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 남편의 목숨을 구해 조정에서 표창을 받고 마을 입구에 정려문을 세워받았습니다. 또한 가평에 사는 어린아이 김희약은 호랑이가 조부를 잡아가자 도끼자루로 호랑이를 쳐서 조부를 구출한 용감한 행동으로 포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문화와 예술 속의 호랑이

호랑이는 조선시대 문화와 예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19세기 '산신도'라는 그림에서 산의 수호신으로 묘사된 호랑이입니다. 이 그림에서 호랑이는 산의 왕으로서 여러 동물이 기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산의 영물과 신성함을 상징합니다.
또한 민화에서는 '까치호랑이'가 유명한데, 여기서 호랑이는 권력층을 풍자하는 바보스러운 캐릭터로 나타나며, 까치는 민중을 대표합니다. 이러한 민화는 사회의 위계구조와 권력 갈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까치호랑이 그림에서 호랑이는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그려져, 폭정을 일삼는 기득권층에 대한 민중의 조롱과 비판을 담고 있었습니다.
민화 속 호랑이는 또한 벽사(辟邪)의 기능을 가진 존재로도 여겨졌습니다. 매년 초에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붙여 악귀와 재앙을 물리치려는 관습이 궁궐이나 민가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으며, 『동국세시기』에는 호랑이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군신화 속 호랑이의 상징 의미

한국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에서도 호랑이는 중요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되기 위해 동굴 속에서 100일 동안 마늘과 쑥만 먹는 시련을 겪는 호랑이는 이 조건을 지키지 못해 탈출하지만, 이는 호랑이가 강인한 용기와 저항의 상징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신화 문화적 맥락에서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을 넘어 민족 정신과 용맹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토테미즘 관점에서 해석하면, 단군신화는 호랑이를 숭배하던 부족과 곰을 숭배하던 부족이 청동기 문화를 가진 또 다른 부족에게 통합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조선 시대에도 호랑이를 일종의 영물로 생각하는 신앙이 존재했으며,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호랑이를 산신이나 산신의 사자로 여기는 믿음으로 발전했습니다.
 

민간 신앙과 '호식총' 문화

조선시대 호랑이 피해를 막기 위한 독특한 민간 신앙도 존재했습니다. '호식총'이라 불리는 특별한 무덤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호랑이에게 당한 희생자의 영혼이 창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의식적 공간이었습니다.
호식총은 돌무덤을 쌓은 후 시루로 덮고, 시루 구멍에 칼과 쇠꼬챙이를 꽂아 만들어졌습니다. 화장을 하는 것은 사악함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함이고, 돌무덤을 쌓는 것은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며, 시루로 엎어 놓는 것은 창귀를 가두는 감옥을 만드는 것이고, 칼과 쇠꼬챙이를 꽂는 것은 창귀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태백산 일대 산간지역에는 현재까지도 220여 개의 호식총이 발견되었으며, 삼척시에 53곳, 태백시에 33곳, 정선군에 33곳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민간 신앙에 따르면 호랑이에게 잡혀 죽은 사람은 창귀(倀鬼)라는 귀신이 되어 황천길에 가지 못하고 이 땅에 머물며 호랑이의 노예로 살게 된다고 믿어졌습니다.
창귀는 다른 사람을 유인해 호랑이에게 바쳐야만 창귀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호환을 당한 집안과는 사돈관계도 맺지 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창귀는 희생자를 찾는데 가족과 인척들 순으로 찾아간다고 믿어져, 자칫 창귀에게 유혹당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멸종으로 이어진 환경 변화와 사냥 압력

산지 개간과 인간의 사냥 압력으로 인해 조선 말기부터 호랑이 개체 수는 급격히 감소하여 20세기 초에는 거의 멸종에 이르렀고, 호랑이는 백두산 일대나 전라도 등 일부 지역으로 밀려났습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마지막 남한 호랑이가 사살된 기록이 남아 실제로는 한국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조선시대 농지 개간 사업으로 인해 호랑이 서식지가 파괴되었고, 호랑이를 잡으면 포상하는 정책으로 인해 호랑이 수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더욱 조직적인 사냥이 이루어져, 1915-1916년, 1919-1924년, 1933-1942년 표범의 공식 포획수만 해도 각각 136마리, 385마리, 103마리로 총 624마리에 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20세기 초까지도 호랑이 사냥은 계속되었는데, 1903년 영국인 사냥꾼 바클레이는 전남 진도에서 호랑이를 잡은 일화를 기록으로 남겼으며, 북한 지역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호랑이 사냥이 행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맹수에게 사람이 희생된 마지막 사례는 1963년 경기도 양주에서 어린이 두 명이 표범에게 희생된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명칭 체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 문헌을 살펴보면, 명확한 명칭 체계가 존재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관들은 虎(호)와 豹(표)를 엄격히 구분하여 기록했습니다.

 

** '범'과 '호랑이'의 언어학적 분석

순우리말 '범'의 의미

'범'은 호랑이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훈민정음 언해에도 나오는 말로,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사용되어온 토박이말입니다. 중요한 점은 '범'이라는 말이 줄범(호랑이)과 돈범(표범)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랑이'의 등장 시기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호랑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호랑이'는 19세기 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한자어로, 虎(범 호) + 狼(이리 랑) + 이(접미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래 '호랑(虎狼)'은 '범과 이리'를 함께 부르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굳어져서 범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화한 후 접미사 '이'와 결합해 '호랑이'가 된 것입니다.

 

** 실제 서식 현황과 인식의 차이

표범의 실제 개체수

놀랍게도 조선시대 한반도에는 호랑이보다 표범이 더 많이 서식했습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9년부터 23년 동안 포획된 표범의 수는 624마리로, 97마리가 잡힌 호랑이 수의 6배가 넘었습니다.

한양의 도시 표범

특히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 한양(현재의 서울)에서 표범이 자주 출몰했다는 것입니다. 15-19세기 기록을 보면 한양의 '도시 표범'에 대한 12개의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 표범은 낡은 궁궐을 은신처로 삼고 도시에서 기르던 가축을 먹이로 하여 생존했습니다.

 
 
 

결론: 조선시대 호랑이의 역사적·문화적 의미

한국의 호랑이는 조선시대를 거치며 사회적 위협인 동시에 문화적, 신화적 상징으로 공존하는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왕과 권력, 산의 신성함, 용맹의 정신이 응축된 호랑이는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의 정체성과 문화 속에서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600여 건이 넘는 호랑이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호랑이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의 크기를 말해줍니다.
비록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멸종되었지만, 호랑이가 담고 있던 상징적 의미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부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의 '수호랑'까지, 호랑이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동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호랑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특별한 애착과 상징적 의미가 현재까지도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