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유교적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게 지배하던 사회였지만, 경제의 현장에서는 여성들도 굳건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여성 상인은 때로는 집안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한 사회의 민생을 책임지는 상업의 주체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조선시대 여성 상인의 여러 활동상과 생생한 일화들을 통해 그녀들의 사회적 의미를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1. 시장과 거리에서 활약한 여성
조선 후기에는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로 5일장, 시전 등 다양한 상업공간이 성장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여성들도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는데, 특히 생선, 빗, 바늘, 장신구 등 여성의 생활과 밀접한 품목의 행상이나 방물장수로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닷가에서는 어부의 아내들이 생선을 이고 다니며 직접 판매하였고, 도성 안팎에서는 채소전, 과일전, 침자전 등 다양한 여인전(女人廛, 여성 상인 전용 상점)이 성행하였습니다.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속에도 생선 광주리를 이고 장사하는 아낙들이 등장합니다. 그 모습은 오늘날 재래시장의 활기찬 풍경과도 어딘가 닮아 있습니다.
2. 한양의 여인전(女人廛)과 여성 상인들 – 전문 상권의 실질적 주역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한양 운종가 등지에는 **여성들만이 상점을 운영할 수 있는 ‘여인전’**이 자리했습니다. 우전(과일), 침자전(바늘), 족두리전(족두리와 노리개), 백당전(엿), 채소전 등 여성의 생활과 긴밀히 연결된 품목을 파는 상점은 대개 여성이 경영했습니다. 비록 국역을 부담하지 않는 영세점포가 많았지만, 여인전 운영자들은 각종 관청 잡역에 동원되거나, 관청이나 궁궐에 물품을 납품해야 하는 의무도 있었습니다. 당시까지도 신분, 성별의 제약이 컸지만, 여인전은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 공간이자, 여성 소비자를 위한 특화된 시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여성 소비자와 거래가 많아 ‘여성만의 시장 권역’을 형성했고, 상권의 주체로 인정받을 만큼 활발한 장사와 시장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시장에서 상행위를 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풍속화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신윤복의 <장터> 등에는 채소를 팔거나 바느질용품을 판매하는 여성 행상(行商)의 일상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당시 남성과 구분되는 여성만의 경제공간과 역할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입니다.
3. 직업과 계층을 넘는 여성 상인의 스펙트럼
박씨와 안씨 – ‘해동화식전’ 여류 상인의 생생한 투자 일화
여성의 상업 활동은 단순한 보따리 장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양의 양반 여성들은 지주로서 전답 경영, 공인권 매도, 고리대 등을 통한 가계 경영의 핵심 주체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야담집 '해동화식전'의 부자 열전에는 여성 상인이 재력을 갖추고 투자에 나선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 김극술의 처 박씨는 남편이 위독해지자 가계 유지를 위해 과감히 사업에 뛰어듭니다. 집안에 여윳돈이 없었지만, 당귀(약초)를 대량 매입 후 시세가 오르자 되팔아 많은 이익을 남기고, 그 돈으로 이번에는 쌀을 사서 조정에 납품하는 등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문 상업적 모험과 성공을 거둡니다.
- 청파동의 과부 안씨는 외롭고 가난한 상황에서도 객점(여관)에 투자해 자금을 불립니다. 그녀는 객점을 임대 운영하며 꾸준하게 이익을 모으고, 마침내 경제적 자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여성들은 투자와 경영, 시장거래 등 폭넓은 상업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들 이야기는 "남편이나 아들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이 가계를 이끈 여성"의 표본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4. 김만덕 – 제주도의 대부호, 나눔의 거상
가장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여성 상인은 제주 출신의 김만덕입니다. 기생 경력을 뒤로 하고 객주를 차린 그녀는 제주 토산물(말총, 미역, 전복 등)을 육지에, 육지 상품(쌀, 옷감, 잡화 등)을 다시 제주에 유통시키며 큰 부를 일궜습니다. 1795년 제주에 극심한 흉년이 닥치자, 김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쌀을 사들여 굶주린 이웃들을 구휼하는 등, 거상(巨商) 이상의 사회적 역할도 했습니다. 이 일로 정조는 김만덕의 선행을 치하하며 그녀를 직접 궁중으로 불러 상을 내렸고, 그녀의 이름은 제주도와 조선사회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 기록에 자주 등장하며, “베푸는 상인”의 대명사로 인식되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구휼한 의로운 자(義人)”라는 칭송은 김만덕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렸습니다.
5. 가족과 사회를 책임진 여성
여성의 상업 활동은 가족의 생계를 위한 순수한 자구책이자, 사회적 변화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장터에서 직접 바느질한 옷이나, 집에서 길쌈한 천을 내다 팔기도 했으며, 때로는 남편의 죽음, 또는 생계의 절박함으로 인해 딸이 가업을 계승하거나, 과부가 직접 대형 상단을 운영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상당수 상단 기록에서, 남성 상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 아내나 딸이 상단 운영의 실질적 책임자가 되어 가계를 이어가는 사례가 등장합니다. 남성의 사회진출이 제한되거나 가세가 기울 때, 여성 상인은 가계를 재건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주체였던 셈입니다.
또 당시 양반가의 가난한 여성 이나 중산층 여성들은 바느질·길쌈 기술을 중심으로 경제 활동을 했습니다.
- ‘침선비집’에서는 여러 여성들이 모여 바느질품을 만들어 장터나 여인전에 판매했습니다.
- 밑바닥에서는 서민 여성들이 길쌈, 삯바느질, 옷 수선 등으로 생계를 꾸렸고, 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 속에서 여성들은 비공식적이지만 주변 경제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숨은 주역이며 ‘경영자·투자자’의 역할까지 수행한 중요한 경제 주체였습니다.
6.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 도전과 의미
조선시대 여성 상인의 활약은 단순한 경제활동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분과 성별의 벽, 유교적 관습과 제약을 뚫고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기여를 동시에 실천한 여성들은, 오늘날에도 깊은 영감을 줍니다. 그녀들은 시장의 풍경을 바꾸고, 집안을 넘어 마을과 지역의 삶을 변화시키는 소중한 씨앗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여성 상인들의 일화와 활약은, 그들의 일상이 오늘날과 비슷하게 노력과 창의력, 그리고 따뜻한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통해 성별, 계층, 경제적 제약을 넘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진취적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여성의 경제 활동과 사회 참여, 그리고 소비자 복지와 연결지어 재해석할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