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았던 역사, 숨겨진 삶을 기록하다
한국 사회의 주류 역사 서술은 오랜 시간 동안 시스젠더와 이성애 중심의 관점으로 채워져 왔습니다. 하지만 단군신화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치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묻혀 온 퀴어와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곳곳에 아주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퀴어 한국사》와 같은 연구와 기록, 그리고 퀴어 아카이브 등이 이러한 흔적을 한데 모아, 365개의 일화로 우리의 시선을 과거 ‘숨어 있던 목소리’로 이끕니다.

퀴어의 흔적, 어디서 찾아볼 수 있었나
고대와 조선: ‘붕’(朋) 자를 새긴 궁녀들의 연대
조선시대 궁녀들 사이에는 특별한 우정(혹은 더 친밀한 관계)을 맺은 이들이 팔이나 엉덩이에 ‘붕’(朋) 자를 문신하는 풍습이 있었던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동료 이상의 감정적, 정서적 유대의 상징이었습니다. 유교 질서와 강압적 통치는 이를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그럼에도 궁녀들은 자신의 감정과 유대를 비밀스럽게 지켰던 것이죠. 그러나 ‘풍습’이라 불릴 정도로 흔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조선 여성사 속의 중요한 퀴어 일화입니다.
구체적 일화:
세종실록 18년(1447년) 기록에는 세자빈 봉씨가 여종 소쌍을 지나치게 사랑해 늘 함께 지내고, 소쌍 역시 다른 궁녀 단지와 애정 관계였음이 삼각관계 형식으로 드러나 폐출 사유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봉씨 본인은 사건에서 물러나려 했지만, 동성간의 연애가 궁중에서 만연했기에 왕은 엄하게 벌을 내렸습니다.
연산군 10년 11월 8일자 <연산군일기>에는 궁녀들 사이에서 ‘붕자’를 새기는 일이 공공연히 있었고, 동성애적 관계인 경우 ‘대식(對食)’이라 불리며, 만약 발각되면 ‘위법교붕’(違法交朋)이라는 죄목으로 혹독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와 1920~30년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조선 여학교에서는 ‘엑스자매’, ‘사랑자매’라고 부르는 특별한 동성 관계가 유행처럼 퍼졌습니다. 사랑의 징표로 은핀을 선물하기도 했고, 기숙사 식사시간이면 가장 맛있는 음식을 사랑자매에게 챙겨주는 등의 따뜻한 일상이 있었습니다. 변심, 이별로 인한 자살 시도와 같은 극단적 사건도 드물지 않았고, 학교 당국이 고민에 빠질 정도로 강렬한 감정 표현이 특징적이었습니다. 이는 일기, 문학, 잡지 속 수기 등 다양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여학생들은 ‘서신 교환’, ‘밀회’, 심지어 ‘동반 자살’까지 각별했던 자신의 사랑을 은밀하게 남겼습니다. 이런 현상은 당대 사회의 억압 속에서도 ‘개인의 자유’에의 열망이 드러난 표식이자, 당시의 규범과 충돌하는 퀴어성의 증거입니다.
구체적 일화:
한 신여성의 수기에서는 “여학생 시대에 동성연애를 안 해본 사람은 별로 없다”로 회고하며, 사랑자매와의 관계가 뜨겁고도 은밀했음을 자랑스레 남겼습니다. 변화한 엑스자매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던 친구의 이야기, 또 사랑을 고백하며 선물로 건네는 은핀의 의미 등이 간행물 <신여성>, <별건곤>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1970~80년대 숨겨진 연대: ‘여자택시운전사회’의 존재
기록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여자택시운전사회’(여운회)라는 여성 중심 소수자 모임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1980년대까지 10여 년 이상 활동하며 자신의 권리를 위한 집단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동성애에 몹시 부정적이었기에, 외부에는 친목모임, 직업인 모임으로 위장했습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동료끼리만 아는 암호와 신뢰”가 있었고, 회원 90% 이상이 레즈비언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동성애자들의 법적 인정, 주거와 결혼·이혼, 자녀 입양, 재산상속 등 오늘날 성소수자 이슈와 맞닿아 있는 일들을 실천했던 ‘가시성 없는’ 운동이 이어졌죠.
일화 추가:
여운회는 회원 중 한 명이 법적 신분 정정이 필요해지자, 단체로 나서 집단 민원을 제출하며 법 밖에서의 연대를 실천했습니다. 이모씨(가명)는 “모임에서는 정체를 숨기지 않고 농담도, 위로도 나누던 기억이 지금도 가장 소중하다”고 회상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초동회와 퀴어 운동의 본격 시작
성소수자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3년 ‘초동회’의 결성에서 비롯됩니다. 한국 첫 공식 동성애자 인권 모임 ‘초동회’의 결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일화입니다. 당시 참가자들은 익명과 비밀이 절실했고, 처음으로 서로의 실명을 밝히며 모여 “우리는 존재한다”를 외쳤습니다. 초동회의 짧은 활동 기간 동안 단체 소식지 1호가 발행됐고, 이후 ‘친구사이’나 ‘끼리끼리’ 등 지금의 단체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 활동하고 해체됐지만, ‘친구사이’,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등으로 뻗어나가며 매체와 소식지 발간, 잡지 <버디>의 탄생까지 운동의 기록으로 남게 됐습니다. 공동체의 등장은 “이반”, “퀴어”라는 정체성 언어와 함께 사회적 가시성의 출발점이 됩니다.
구술 사례:
당시 한 참여자는 “오랜 익명성 뒤에 처음 얼굴과 이름을 밝힐 때, 우리가 한국에서 처음이었다는 긴장감과 자부심이 동시에 있었다. 존재 자체가 투쟁이었고, 모임이 곧 용기였다”고 남겼습니다.
근현대의 대중문화 속 퀴어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의 등장은 대중이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각종 퀴어 영화제, 퀴어 퍼레이드, 대학별 단체 등은 표면적인 차별과 탄압을 뚫고 역사적 주체로 성장해 왔습니다.
추가 퀴어 일화: 근·현대 대중문화와 커뮤니티
-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방송 데뷔: 2000년대 초,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연예계 데뷔는 한국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린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비난과 조롱이 따랐으나,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며 용기를 낸 계기가 되었습니다.
- 게이 크루징 문화 형성: 1970~80년대 서울 종로 등지에서는 게이들이 조심스럽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특정 공간(공원, 누누모텔 등)에서 만남을 가졌고, 경찰의 단속과 사회 낙인을 피하며 비밀스러운 네트워크가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구두 전승과 비공식 커뮤니티 역시 중요한 퀴어 일화입니다.
이처럼 소수자 역사는 공식 기록보다 당사자의 구술, 체험담, 은유와 상징(붕자, 은핀, 모임명 등) 안에 더욱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국 퀴어의 숨은 삶과 연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위로와 힘, 그리고 성찰을 전해줍니다.
일화로 보는 퀴어 역사의 순간들
“나는 궁궐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와 몰래 팔에 붕(朋) 자를 새기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다. 남몰래 주고받던 신호 속에, 우리만의 연대와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들키면 돌이킬 수 없는 벌이 기다린다는 것을, 두려움과 기쁨이 늘 공존했다.”
— 조선시대 궁녀의 기록에서 각색
“1993년, 나는 초동회의 첫 모임에 참가했다. 이름도 연락처도 공개하면 무서웠지만, 우리는 ‘존재’ 자체를 증명해야 했다. 떠들썩했던 그날, 마치 세상에서 투명인간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 초동회 결성 참여자 구술사례
“1980년대 여자택시운전사회에 들어갔다. 아무도 우리 정체를 크게 묻지 않았지만, 동료끼리만 아는 암호와 신뢰가 있었다. 법적 보호도 없었고, 늘 위험과 싸워야 하지만, 일터에서 만난 소수자가 서로 격려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 여성 중심 소수자 모임 참가자의 회상
변화와 과제: 아직도 이어지는 싸움
오늘날에도 퀴어와 소수자들은 권리와 인식을 넓혀가고 있지만, 여전히 장소 대관 취소, 차별과 혐오 표현, 제도적 보장 미흡 등으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었던 것’임을 보여줍니다. 소수자들이 남겨온 기록과 이야기들은 오늘 이 순간에도 계속 이어지는 한국사 속 또 다른 주류의 목소리입니다.
퀴어의 시선으로 한국사를 다시 읽는다는 것
‘정상’만이 아닌 ‘다양함’으로서의 역사를 읽는다는 건, 우리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상상하는 힘입니다. 소수자 존재의 역사는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될 한국 사회 변화의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나은 내일로 가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이 글은 《퀴어 한국사》, 성소수자 인권 운동 및 기록 자료, 관련 서적과 아카이브, 그리고 시대별 사례연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