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끝으로 맞선 항일의지
일제강점기, 언론인과 기자들은 단순한 보도자를 넘어 조국의 독립과 국민 계몽을 위해 목숨을 건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습니다. 일본의 철저한 언론 탄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사회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억압된 언론, 검열된 사상, 억지로 강요된 ‘황국신민’의 길. 그 속에서 ‘펜’만으로 맞섰던 언론인들은 시대적 양심이자, 독립운동의 또 다른 전사였습니다. 그들의 투쟁 속에는 뜨거운 용기와 사명감, 그리고 민족을 위한 애틋한 사랑이 서려 있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신채호 : “내 목숨보다, 진실이 우선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많은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언론투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신채호입니다. 그는 『황성신문』 기자,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당당한 논설을 통해 민중의 의식을 계몽하고 정부의 무책임함을 꾸짖었습니다. 신채호는 일제 탄압으로 신문이 정간될 때마다 더욱 강렬한 항일의 목소리를 올렸고, 이후 임시정부 설립과 역사서 집필로 민족의식을 깨우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하루는 1907년, 신문사에 일제 경찰들이 급습해 들이닥쳤습니다. 검열관은 신채호에게 “왜 이렇게 불온한 기사를 쓰느냐?”고 호통쳤고, 신채호는 정색하며 답합니다.
“기자가 진실을 쓰지 않는다면, 신문을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검열로 진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다시 쓸 것입니다.”
결국, 대한매일신보는 여러 차례 발행 중지와 압수, 그리고 빗발치는 협박 속에서도 신채호와 동료 기자들은 몰래 인쇄 기계를 옮겨가며 신문을 지속해서 만들어냈습니다. 때로는 작은 인쇄소에서, 때로는 소규모 밀실에서 신문을 몰래 찍어내는 등 치열한 숨바꼭질 끝에 민중에게 사실을 전하는 데 성공합니다. 어느 날, 신채호는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면서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없어도 이 신문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어떤 위협에도 조국을 깨우는 목소리는 꺼지지 않는다.”
이런 결연함이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일부 독자들은 변장해 배우자나 자녀의 도시락통 밑에 신문을 감춰 몰래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일화를 통해 보는 언론인의 투쟁
1) 동아일보 장덕준: 취재의 현장에서 사라진 기자
1920년,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은 만주 경신참변(조선인 3,500명 학살 사건) 진상취재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주축으로 활동하며, 일제 만행의 현장을 직접 누비며 사실을 기사화했습니다. 그의 투신은 우리 언론인 최초의 순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신참변이 일어났을 때 장덕준 기자는 즉각 현장 취재를 자원합니다. 동아일보 동료들은 “목숨이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그는 “기자가 가장 먼저 진실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만주로 떠나는 밤, 장덕준은 가족에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내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내 기사가 세상에 전해진다면 그것이 곧 내 삶의 이유입니다.”
장덕준은 혼자 국경을 넘었고, 마을 곳곳을 몰래 취재하며 일본군의 만행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피해자 가족을 증언자로 만나고, 불에 탄 시체들 사이에서 기자수첩에 떨리는 손으로 진실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 후 장덕준의 소식은 끊겼고, 결국 그는 일본 헌병에 연행된 뒤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가 남긴 취재노트 일부만이 동료들에게 전달되었고, 동아일보는 그의 노트를 바탕으로 “만주 만행의 현장”이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는 전국적 분노와 항일 시위의 불씨가 되었죠.
2) 조선일보 이석(이봉수): 죽음을 무릅쓴 고발
1924년 평북 위원군 화창면의 마을 학살 사건. 현장에 접근하는 것조차 위험했던 상황, 조선일보 기자 **이석(본명 이봉수)**은 경성의 전체 기자를 대표해 위험을 무릅쓰고 변장을 하고 조용히 야간에 마을에 진입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일본 군경이 순찰을 돌고 있었고, 이석은 숯장수로 위장해 마을 사람들과 몰래 접촉합니다. 불에 타 버린 초가집을 촬영하지 못하자, 그는 기왓장 부스러기를 모아 손수건에 싸 담습니다. 현장 어르신의 증언을 받아 적던 중, 일본 순사가 들이닥쳐 “여기서 뭐 하냐!”고 윽박지르자, 이석은 능청스럽게 “어머니가 여기 살아서 왔다”고 둘러대며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석은 목숨을 걸고 입수한 현장 증언과 소지품 덕에, 그 직후 조선일보에 “화창면 학살의 진상” 보도를 실으며 일제의 만행을 국내외에 알렸습니다. 이 기사로 이석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끝내 동료와 가족의 이름을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제 경찰의 위협 아래 “쥐도 새도 모르게” 일어났던 만행을 용기 있게 보도해 조선인들의 분노와 저항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이석은 동료 언론인 장덕준이 취재 중 목숨을 잃은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기자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3) 송기찬 : 만주에서 조국 땅의 ‘소리’를 전하다
송기찬은 청년 시중국 만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일제에 잡혀 고초를 겪었고, 돌아와 언론을 통해 조국의 참상을 고발했습니다. 평범한 신문기자처럼 보였으나, 그의 기사 한 줄 한 줄에 담긴 사회적 정의감과 민족의식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동운동 및 사회문제에도 충실한 보도를 펼치며 풀뿌리 항일저항을 도왔습니다.
한 번은, 일제 고위 관리들의 야만적인 만주 탄압 소식을 듣고 직접 중국인 노동자들을 만나 취재했습니다.
<중략: 한 일화>
그날 밤, 취재를 마친 송기찬은 반쯤 부서진 흑백 카메라를 품에 안고 경찰서를 두려운 마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경찰은 그의 소지품을 수색하며 “누가 시켰냐”고 몰아붙였습니다. 송기찬은 단호하게 “이건 내 민족의 부름이고, 내 기자의 양심일 뿐”이라고 응수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노동운동, 실업자 구호사업, 소작쟁의 등을 현장에서 취재·고발하며 민중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기사로 남겼습니다.
‘지하신문’과 해외 언론의 항일투쟁
3.1운동이 터진 후, 일제의 검열망을 피해 수십 종의 ‘밀간지’가 제작되었습니다. 지하신문(비밀신문) 29종이 국내외에서 발간되었고, 3.1운동 직후 보성사는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1만 부를 찍어내며 독립 시위 확산을 선동했습니다. 어느 날, 작은 서점 지하실에서 조선독립신문을 찍던 인쇄공이 일제 경찰의 단속에 쫓기는데, 배달원 소녀가 신문 뭉치를 앞치마에 넣고 뒷골목을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해외에서도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창간, 세계에 일제의 만행과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홍보했습니다. 얇은 양지에 인쇄한 신문이 심부름꾼 소년의 도시락 통에 담겨 조선까지 밀반입되었습니다. 그 신문을 기다리는 이들은 밤중에 촛불 하나에도 서성였고, 신문이 도착하면 마을 공동체가 모여 “드디어, 우리의 소식이 왔다!”며 서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밖에도 임시정부 기관지, 만주·러시아·미국 등지의 외곽 신문들은 국민을 일으킬 소중한 등불이었습니다.
일제의 언론 탄압과 언론인들의 불굴
언론인들의 저항은 일제의 무자비한 검열·정간·투옥 등 끊임없는 탄압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을 중심으로 언론인들은 반복되는 폐간, 투옥에도 항일 기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보도 이후, 조선일보 김무삼 등 기자들은 거리로 나가 전단지를 배포하며 학생들과 연대하는 등 사실상 지하항쟁가 못지않은 용기를 보탰습니다.
오늘에 남은 언론인의 정신
우리 역사의 소중한 한 장면인 일제강점기 언론투쟁의 역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언론인들의 살아있는 증언입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언론인과 기자들은 단순히 기사만 쓴 것이 아니라, 직접 위험 속에 몸을 던져 민족의 진실을 알리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글을 쓰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소중한 언론 환경의 밑거름에는 이들과 같은 선열들의 희생과 결기가 깔려 있습니다. 그들의 투지와 희생, 뜨거운 감정이 묻어 있는 생생한 일화들은 오늘날 언론의 소명과 사회적 책임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진실 앞에 불굴의 펜” – 그 외침은 우리 역사와 국민 모두에게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