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는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와 달리 실제로는 다양한 외국 출신 인물들이 함께 만들어온 다문화의 연속체였습니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귀화인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며 정치, 문화,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들의 정착 과정은 단순한 외부인의 동화를 넘어 한국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귀화인들
임진왜란의 영웅, 김충선(사야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가장 극적인 귀화 사례가 펼쳐졌습니다. 일본군 장수 '사야가(沙也可)'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우선봉장으로 조선에 침입했지만, 조선의 문물과 풍속에 감화되어 부하 3,000여 명과 함께 귀화를 결심했습니다.
사야가는 조선에 상륙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조선 백성들에게 효유서를 돌리며 "나는 본디 동토(東土-朝鮮)가 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와 보기를 원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단순한 투항이 아닌 문화적 동경에서 비롯된 진정한 귀화였음을 보여줍니다.
선조는 그의 진심을 알아보고 김해 김씨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김충선은 이후 조총과 화포 제작 기술을 전수하며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도 공을 세워 '임갑병 3난의 공신'이라 불렸습니다.
김충선의 후손들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가 제정한 가훈은 "효제충신을 업으로 삼고, 예의 염치를 가풍으로 하여 자자손손 서로 전하며 화목하게 지내라"는 내용으로 조선 사회의 유교적 가치를 완전히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최초의 서양인 귀화자, 박연(벨테브레)
1627년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는 조선에 정착하여 '박연(朴燕)'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헨드릭 하멜보다 26년 앞서 조선에 도착한 최초의 서양인 귀화자였습니다.
박연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외국인 관리 업무를 맡았고, 서양의 군사 기술을 활용해 홍이포(紅夷砲)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동료 두 명이 전사하는 가운데서도 살아남아 조선에 대한 충성을 보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박연이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박연은 통역을 맡아 두 네덜란드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는데, 하멜은 박연이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깊이 조선 사회에 동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대규모 항왜들의 정착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은 김충선만이 아니었습니다. 1597년 도원수 권율의 보고에 따르면 "항왜(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이미 1만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조선에 정착하여 향화인(向化人)이 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김향의(金向義), 김귀순(金歸順), 이귀명(李歸命) 등 '충성스럽고 선하다', '의로 향하였다', '순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의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예조에 소속시켜 관리했으며, 화약 제조 등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관청에서 근무하게 했습니다.
고려시대의 포용적 귀화 정책
베트남 왕족 이용상의 정착
고려시대에는 더욱 다양한 귀화인들이 유입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李龍祥)입니다. 1226년 정란으로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해 바다로 도피한 이용상은 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에 표착했습니다.
고려 고종은 이를 측은히 여겨 그를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정착을 도왔습니다. 이용상은 몽골군 침입 때 '백마장군'으로 활약하며 침략자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어 현재까지 약 1,775명이 살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 정부는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했고, 베트남인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며 왕손 예우를 했습니다. 현재도 매년 리 왕조 건국기념일에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받고 있어 양국 우호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제도를 도입한 쌍기
고려 광종 때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는 956년 봉책사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머물게 되었습니다. 광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한림학사로 임명했고, 쌍기는 958년 과거제도의 실시를 건의했습니다.
과거제도의 도입으로 실력이 없는 개국공신이나 호족의 자제들은 점차 권력에서 멀어져 갔으며, 이는 광종의 개혁정치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쌍기는 중국 출신으로서 별다른 정치적 이해가 없기에 고려의 내부인이 쉽게 시행할 수 없는 제도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투화전(投化田) 제도
고려시대에는 외국인의 귀화를 장려하기 위해 '투화전(投化田)'이라는 특별한 토지 지급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본국에 귀화한 사람에게 종신토록 받아 먹게 하되, 죽으면 나라에 반납하며, 관직을 받아 구분전을 갖게 되면 허락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특히 934년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을 때, 태조는 대광현에게는 성을 하사하고 종실에 부적하였으며, 신료들에게는 작을 내리고 군사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토지를 지급했습니다. 이는 대규모 귀화인 집단에 대한 체계적인 정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근현대 귀화와 이민의 변화
일제강점기의 복잡한 국적 문제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인의 국적 문제가 매우 복잡했습니다. 조선인은 법적으로 일본 국적을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국적법에서 배제되었습니다. 1920년 개정된 일본 국적법에는 "일본에 5년이상 거주한 외국인은 귀화를 신청할 수 있다. 단, 조선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어 차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지만 '비국민적 국민'으로 간주되어 헌법과 국적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애썼습니다.
해방 후 한인 귀환과 새로운 이민
해방 후에는 일제강점기에 해외로 나간 한인들의 귀환이 대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재일한인의 경우 1945년 약 230만 명에서 1947년 약 60만 명으로 급감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부터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 가족재회,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962년부터는 정부 차원의 이민정책이 수립되어 본격적인 해외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현대의 귀화 현황
현재 한국의 귀화제도는 일반귀화, 간이귀화, 특별귀화로 구분되며, 2019년부터는 영주자격 전치주의가 도입되어 일반귀화 신청자는 반드시 영주자격(F-5)을 먼저 취득해야 합니다. 2021년 기준으로 일반 귀화 심사를 통해 국적을 취득한 이는 1만895명이며, 면접 합격률은 45%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강남(일본 출신 가수), 파비앙(프랑스 출신 방송인) 등 연예계 인사들의 귀화나 영주권 취득 사례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오래 살고 싶어서", "이제까지 비자 만료일이 다가오면 마음 놓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가 없었다"며 안정적인 체류를 위한 귀화 동기를 밝혔습니다.
귀화인들이 남긴 유산과 교훈
성씨로 본 다문화의 역사
한국의 275개 성씨 중 136개가 귀화성일 정도로 우리 역사는 다양한 민족들의 융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부터 흉노족 왕자 김일제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김해 허씨의 시조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주요 성씨들 상당수가 외국 출신이라는 사실은 '단일민족' 신화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보여줍니다. 오히려 한국은 고대부터 다양한 민족들이 어우러져 살아온 다문화 사회였습니다.
포용과 통합의 지혜
조선과 고려시대 귀화인들의 성공적인 정착 사례를 보면, 당시 한국 사회의 포용력과 통합 정책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김충선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이용상을 화산군으로 봉하며, 투화전을 지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것은 현대의 다문화 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특히 이들 귀화인들을 '선주민'이 차별하거나 배척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는 점은 당시 한국 사회의 개방성과 문화적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귀화인들이 정치, 군사, 기술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사회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현대적 의미와 과제
오늘날 한국 사회는 다시 한 번 다문화 사회로의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2022년 기준 국제결혼이 농촌에서 4쌍 중 1쌍에 이를 정도로 다문화 가정이 증가하고 있으며, 외국인 주민의 수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귀화인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해온 경험이 풍부합니다. 고려의 투화전 제도, 조선의 사성(賜姓) 정책 등은 현대의 이민정책에도 참고할 만한 사례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동화가 아닌 상호 존중과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진정한 통합입니다.
김충선이 조선의 유교적 가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일본의 군사 기술을 전수했고, 박연이 조선 사회에 동화되면서도 서양의 과학 기술을 기여한 것처럼, 현대의 귀화인들도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과 근현대를 관통하는 귀화인들의 이야기는 한국이 결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역동적인 다문화 사회였으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 귀화인들의 성공적인 정착 경험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다문화 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