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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간첩 활동의 모든 것 : 세종대왕의 체탐인부터 황옥 사건까지

이모는 2025. 7. 31. 20:59

조선의 은밀한 첩보전, 국가를 지킨 그림자들

조선시대하면 유교적 질서와 평화로운 농업사회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첨예한 대외관계와 국가 안보를 위해 치밀한 정보 활동이 이루어졌던 시대였다. 특히 세종대왕 시절에는 체계적인 첩보부대까지 조직하여 운영했을 정도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이 활발했다.
 
 

조선의 은밀한 첩보전, 국가를 지킨 그림자들

 

세종의 비밀 첩보부대 '체탐인' - 조선의 특수부대

조선 초기 가장 주목할 만한 첩보 활동은 세종 15년(1433년)에 창설된 **체탐인(體探人)**이다. '몸소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들은 현재의 특수부대나 첩보원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체탐인의 임무와 활동

체탐인의 주요 임무는 두 가지였다:

  1. 국경선 근처에서 여진족이 침입할지 여부를 감시하는 일
  2. 여진족 본거지로 깊숙이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일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파저강(婆猪江)까지 진출하며 적의 동태를 살폈다. 평안도에만 540명의 체탐인이 배치되어 있었을 정도로 대규모 조직이었다.
 

체탐인들의 처절한 희생 - 죽음을 각오한 임무

1433년 압록강 건너편 산속에서 벌어진 체탐인들의 활약상은 마치 현대 스파이 영화를 연상케 한다. 20여 명의 체탐인이 3명씩 조를 이뤄 여진족 마을에 잠입했다. 이들은 "우리는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조선 땅에 터를 잡았으니 임금께서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한다"며 음식과 술을 건네며 접근했다.
 
여진족들이 경계를 풀고 술잔치를 벌이는 사이, 체탐인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인구와 무기를 확인하고 근처 길목에 표시를 해두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군은 일정을 변경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 여진족 토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체탐인들의 활동은 극도로 위험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체탐인들의 처절한 희생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김옥로의 죽음: 세종 19년(1437년) 6월, 우라산성을 정찰하던 체탐인 김옥로가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전사했다. 실록에는 "체탐자 김옥로가 산성을 정찰하다가 여진적과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유족에게는 부세 면제와 쌀·콩 2석이 지급되었지만, 이는 5인 가족의 한 달 양식에 불과했다.
 
김장의 영웅적 활약: 세종 19년 또 다른 체탐인 김장은 50명의 군사와 60명의 알타리(국경지대 향도)를 이끌고 우라산성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허종으로부터 "어쩌다가 길에서 올적(兀狄, 여진족의 다른 이름)과 만나게 되면 어찌할 것이냐"는 걱정을 듣기도 했지만, 과감하게 적진 깊숙이 침투해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다.
 

위험한 임무, 그에 따른 포상

체탐인들의 임무는 극도로 위험했다. 낯선 지형과 맹수, 급류 등 자연적 위험 요소는 물론, 여진족의 매복과 급습을 당할 위험도 상존했다. 심지어 여진족들은 체탐인의 신원을 파악한 후 그들의 가족을 공격하는 보복을 가하기도 했다. 조선인의 아지트가 발각되어 체탐인들이 살해당한 기록도 있고, 마치 현대 영화에서처럼 유능한 특수부대원의 집이 공격을 받아 가족들이 살해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포상도 파격적이었다. 체탐인들은 하루 정탐하면 15일의 휴가를 받았고, 3년마다 50명 중 1명을 뽑아 6품 이하의 산관직을 주어 정식 문관이 될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당시 최첨단 개인화기인 세총통(細銃筒)까지 지급받았다.
 

** 체탐인의 특별한 자격 조건과 훈련 **

체탐인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들이 필요했다.
 
외모와 체형: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와 체형이 중요했다. 너무 크거나 작으면 적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 능력: 여진족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귀화한 이민족도 체탐인이 되곤 했다.
무예 실력: 적과 마주쳤을 때 생존할 수 있는 무예 실력이 필수였다. 조선 최첨단 개인화기인 세총통(細銃筒)까지 지급받았다.
 
 

보부상의 이중 역할 - 상인과 첩보원 사이

조선시대 또 다른 중요한 정보 수집 조직은 보부상이었다. 겉으로는 전국의 장시를 돌며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이었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정보 수집망 역할을 담당했다.
 

보부상의 첩보 활동

보부상들은 전국에 산재한 시장을 지배하고 국가 유사시에는 양곡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관계로, 자연스럽게 세상물정과 개개인의 비밀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전파시키며, 사발통문(沙鉢通文) 등의 통신임무까지 수행했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에는 관군을 돕는 한편 정탐과 연락을 맡기도 했다. 이들의 전국적 네트워크는 조선의 중요한 정보 자산이었던 것이다.
 

백달원과 조선 건국의 숨겨진 이야기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로 불리는 백달원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백달원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전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전파하는 첩보 네트워크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에도 백달원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최초의 보부상 조직인 '혜민국'을 만들어 주었다.

임진왜란 때 보부상들의 활약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보부상들은 관군을 돕는 한편 정탐과 연락 임무를 맡았다.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수천 명의 보부상들이 참여하여 양곡과 군수물자를 운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여 조선군에 전달하는 첩보 활동도 수행했다.
한 보부상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왜군이 어느 길로 오는지,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를 미리 알아서 우리 군사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적혀 있어, 보부상들이 단순한 상인이 아닌 첩보원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정보 활동의 체계와 특징

조선의 정보 활동은 승정원, 예조, 비변사, 병조 등 다양한 기관에서 분담하여 수행되었다. 특히 대외 정보 수집의 경우 왕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도절제사를 중심으로 변경 지역의 정보 활동이 이루어졌다.
 

명나라 사행단의 정보 수집

16세기 조선의 대명(對明) 사행단도 중요한 정보 수집 역할을 담당했다. 정사는 정보 탐문을 총지휘하고, 통사는 1차적인 정보 수집을 담당했으며, 서장관은 습득한 정보에 대한 정식 보고를 담당하는 체계적인 분업이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밀정의 비극 - 황옥의 미스터리

조선시대와는 달리, 일제강점기에는 동족을 배신하는 밀정들이 등장하여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은 밀정의 존재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황옥의 복잡한 정체성

황옥(1885~1950?)은 서울 출신으로 일본 경찰에서 경부(경감급)까지 승진한 조선인이었다. 그는 1920년 경기도경찰부에 특채되어 고등경찰로 활약했으나, 동시에 의열단과도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23년 황옥 경부 폭탄사건의 전말

김시현과의 운명적 만남: 1920년 9월, 황옥이 의열단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밀양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김시현을 서울로 호송하면서였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갖게 되었고, 김시현은 황옥이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천진에서의 비밀 회동: 1923년 2월 8일, 일경은 황옥을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에 사용한 폭탄의 출처를 알아보라고 천진으로 출장을 보냈다. 하지만 황옥은 동행한 하시모토를 따돌리고 김시현과 함께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났다. 김원봉은 황옥을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판단하고 그를 의열단에 가입시켰다.
폭탄 운반 작전: 황옥은 조선총독부가 발급한 비표를 이용해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조선으로 밀반입하는 데 성공했다. 3월 3일, 김시현과 황옥이 천진에서 폭탄을 넘겨받아 여행가방에 넣고 안동까지 운반했다.
안동에서의 연회: 3월 8일 홍종우는 자신의 집에서 조선일보 안동 지국 설치 축하 연회를 열었다. 이는 폭탄 운반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회에는 안동 영사관 김우영 부영사, 신의주 경찰서 최두천 경부 등 일본 관리 10여 명과 김시현, 황옥, 기생들이 참석했다. 한참 즐겁게 먹고 마시다가 신의주로 가서 2차를 하기로 했는데, 이때 폭탄과 유인물은 인력거 뒤에 실려 운반되었다.

황옥의 최후와 미해결 수수께끼

1923년 3월 14일부터 일경은 의열단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7일에 유석현, 19일에 황옥이 체포되었고, 3월 30일에 김시현이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황옥은 자신이 의열단을 도운 것은 의열단을 검거하기 위한 비밀 작전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열단장 김원봉과 김시현은 황옥이 진정한 의열단원이라고 증언했다.
 
황옥은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결핵으로 1925년 12월 가출옥했다가 1928년 5월 재수감되었다. 1929년 다시 가출옥한 이후 해방까지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황옥의 딸이 남긴 말이 그의 복잡한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인정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진정한 생각은 하늘과 땅, 그리고 당신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른다."
 

간도 15만원 사건의 배신

1920년 간도에서 벌어진 15만원 강취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을 뻔한 사건이었다. 철혈광복단이 일본의 현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거금을 탈취한 후, 이를 무기 구입과 사관학교 설립에 사용하려 했다.
무기 거래 과정에서 밀정 어민섭의 밀고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어민섭이 안중근의 의형제로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어민섭은 1908년 국내 진공 작전 실패 후 스스로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 "첩보자로서 고용해 달라고 청했다"는 기록이 영사관 기밀문서에 남아있다. 용정 총사령관은 밀정에게 하루 1원씩의 대가를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 일당의 3배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현대적 의미와 교훈

조선시대의 첩보 활동은 단순한 군사 정보 수집을 넘어서 국가 존립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활동이었다. 체탐인들의 목숨을 건 정보 수집이 있었기에 조선은 여진족의 침입을 막고 북방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보부상들의 전국적 네트워크는 조선 후기까지 중요한 정보 자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밀정들이 보여준 것처럼, 정보 활동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국가를 위한 정보 수집이 때로는 동족을 배신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겨준다.
 
 
 
조선시대 간첩 활동은 드라마나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실제 역사였다. 세종대왕의 체탐인부터 보부상의 첩보 활동, 그리고 황옥과 같은 복잡한 인물들까지, 조선은 나름의 체계적인 정보 수집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체탐인 김옥로의 죽음, 황옥의 미스터리한 정체성, 어민섭의 배신 등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시대적 상황을 보여준다. 이들의 숨겨진 활약이 있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500여 년간 존속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들의 비극적 운명은 정보 활동의 양면성을 깨닫게 해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조선시대 첩보 활동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국가 안보의 소중함과 정보 활동의 양면성을 동시에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그림자 속 영웅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과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