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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광억 : 100여 차례 대리시험으로 전설이 된 거벽(巨擘)

이모는 2025. 7. 26. 16:30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관리를 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독특한 제도였습니다. 관리를 뽑는 공정한 절차로 설계되었으나, 현실은 늘 이상과 달랐습니다. 경쟁이 극심해지고, 신분제 사회의 한계가 겹쳐지면서 부정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특히 ‘거벽(巨擘)’이라 불리는 대리시험 전문가 집단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영남 합천 출신 유광억(柳光億)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후기 수십, 혹은 백여 회에 달하는 대리시험 사건으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그의 삶은 단순한 비리 이상의 사회적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화첩평생도』중 소과응시 / 출처 : 디트NEWS24

 
 

1. 신분과 재능 사이 – 가난한 천재의 고뇌

유광억은  명문가 출신도 고위 관료 집안도 아닌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조선은 엄격한 신분사회로, 출세의 길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문학적 재능, 특히 과거시험에 출제되는 과시(科詩: 과거 답안용의 독특한 시체) 를 작성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력만으로는 신분의 벽을 넘기 힘든 사회적 한계 앞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팔기로 합니다. 이 재능은 곧 ‘대리답안을 작성해 주는 일’로 연결됩니다. 곤궁한 처지와 사회구조적 한계 속에서, 유광억은 자신의 재능을 ‘대리시험’이라는 그릇된 방식으로 팔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국적으로 유명한 거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 ‘거벽’ 유광억, 대리시험의 대명사로

조선 후기 사회에서 '거벽'은 과거시험 답안 대필을 전문적으로 하는 부정행위자를 뜻하는 말로, 당시 사회의 만연한 입시 부정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유광억은 전설적인 존재로 손꼽혔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낮은 신분 탓에 문학적 재능을 정당하게 펼치기 어려웠고, 이에 자신의 특출난 글 솜씨를 활용해 부유한 집안 자제나 고위 관료의 자녀를 위한 과거 답안 대리 작성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유광억은 단순히 부정행위를 넘어서, 받은 수수료의 액수에 따라 답안의 질을 달리하는 치밀함과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남다른 문장력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처럼 유광억은 단지 정답을 베끼는 수준이 아닌, 의뢰인의 배경과 요구에 맞춰 맞춤형 답안을 제공했던 전문성과 냉철한 현실 인식을 겸비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많은 부유한 가문들이 자녀의 합격을 위해 먼저 그를 찾게 되었고, 실제로 수십 회에서 백여 회까지 대리시험을 치렀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의 활약은 영남 지방을 넘어 조선 전국으로 퍼지면서, 시험 공정성이 무너지고 소수 특권층만이 혜택을 누리던 시대상과 맞물려 입시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 상실을 불러왔습니다.
 
유광억의 삶과 활동은 단순한 입시 부정의 사례를 넘어, 신분제 사회의 한계, 사회 구조적 모순, 그리고 능력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당시 현실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줍니다. 그는 ‘시험 부정을 프로페셔널하게 수행한’ 거벽의 대표주자이자, 조선후기 부정 입시 문화의 정점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3. 대담무쌍한 시험 내기와 부정 적발

유광억 사건은 조선 후기 입시 부정의 현실과 시험제도 신뢰 붕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경상 감사와 경시관이 그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내기를 한 일화입니다. 과거시험에서 뽑힌 장원, 차석, 3등 답안 모두 유광억이 대필한 작품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름은 적히지 않았지만, 내부 조사로 부정행위가 드러난 이 사건은 단순 개인의 부정이 아닌 조직적이고 치밀한 시험 부정을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과거제도의 공정성이 큰 타격을 받았고, 실력보다 배경과 돈이 중요해지는 부패한 사회 현실이 드러났습니다. 유광억은 수수료에 따라 답안의 수준을 조절하는 치밀함으로 시험 부정을 프로페셔널하게 수행했으며, 이 사건은 과거제 폐지의 단초로 여겨질 만큼 큰 사회적 상징성을 갖습니다.
 
 

4. ‘과적(科賊)’ 자처와 비극적 최후

부정행위가 적발된 후, 유광억은 스스로 자신을 ‘과적’ 즉, 과거제도의 도둑이라 부르며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의 운명은 암담했습니다. 당시 법제도는 대리시험자뿐 아니라 의뢰인도 엄중히 처벌했고, 고문과 사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광억은 친척들과 마지막 술자리를 함께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며 자신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조선 후기 신분제 사회와 과거시험의 부정부패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5. 유광억 사건이 조선사회에 남긴 영향

유광억의 대리시험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조선 후기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 도덕적 타락, 그리고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 과거제도의 신뢰 붕괴: 시험 부정행위가 드러나면서 과거시험의 공정성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 죄’라는 인식 속에서도 관행처럼 부정이 계속되었고, 사회 전반의 도덕적 해이 현상을 심화시켰습니다.
  • 부패와 물질만능주의 확대: 시험 부정에 뇌물과 청탁이 얽히며 권력층과 경제력 있는 계층이 시험의 합격권을 좌우하는 시대상이 강해졌습니다. 실력보다는 ‘돈과 뒷배경’이 중요하게 되면서 시험의 의미는 퇴색했습니다.
  • 사회구조적 불평등 심화: 신분제 사회에서 하층민이나 가난한 재능가들은 정당한 길이 막혀 대리시험과 같은 부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신분제의 한계와 사회적 불평등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 문학과 사회적 경각심의 소재: 유광억의 이야기와 관련 문학작품 『유광억전』은 당시 사회의 부정부패와 도덕적 해이를 고발하고 반성하게 하는 상징적 자료가 되었습니다.

 

6. 현대에 던지는 교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입시 부정, 학벌주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입니다. 유광억의 삶과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일화가 아니라, ‘공정성’과 ‘기회의 평등’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살아있는 경고입니다. 제도적 장치 확립뿐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윤리의식을 공유하고 제도를 신뢰하는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유광억은 조선 후기의 ‘거벽’으로서 전설적인 존재였지만, 그의 삶은 신분제와 부정부패가 만들어 낸 비극적 현실의 상징입니다. 뛰어난 재능과 치밀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 구조적 한계 속에서 부정이라는 어두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과 공정성, 인간 도덕성에 관한 깊은 성찰을 오늘날까지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개인이 선택한 삶의 무게와, 공정한 사회를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