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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취업 준비생'의 삶 : 지금과 다르지 않은 취업 전쟁

이모는 2025. 7. 23. 18:56

과거시험, 조선의 취업 전쟁

‘취업 준비생’은 오늘날도 빼놓을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지만, 실은 조선시대 역시 청년들의 가장 큰 숙제였다. 당시 ‘취업’은 곧 ‘관직 진출’, 즉 과거시험 합격을 뜻했고, 이를 위해 수많은 선비와 양반가 자제들이 평생을 바쳤다. 조선의 과거 준비생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그들의 현실은 오늘날과 얼마나 닮았을까?
 
 
 

조선시대 '취업 준비생'의 삶

 
 

과거시험, 조선 사회의 입시 시스템

조선시대의 관직 등용 시험인 과거(科擧)는 주로 양반, 일부 평민 자제들에게 열려 있었으며, 출세와 경제적 안정을 위한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과거시험을 통과하면 고위관리가 될 기회가 주어졌고, 이는 사회적 명예와 가족의 안녕, 미래 세대의 신분까지 좌우하는 일이었다.
 
양반가에서는 아이가 대체로 5~6세가 되면 한자교육과 기초적인 경전 공부를 시작했다. 그 후 서당이나 향교, 성균관 같은 교육기관에서 정규 교육을 받으며 천자문, 동몽선습, 격몽요결, 논어, 맹자 등 유교 경전을 차례로 익혔다. 공부의 기본은 암기였다. 한자가 빼곡한 경전부터, 문학적 소양을 위한 시문, 때로는 실제 과거 기출문제까지 반복하며 독서와 암송을 이어갔다.
 
 

**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 급제, 오자등과(五子登科)

이예장·안중후 등 다섯 형제가 동시에 과거에 합격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를 가문의 큰 영광으로 여겨 부모에게 해마다 쌀 20석을 하사했습니다. 이처럼 힘든 과거 준비 과정에서 온 가족이 협심해 모두 급제했다는 사실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어, 가정의 화목과 우애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오자등과'라는 단어가 생겨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일화입니다.
 
 

끝없는 경쟁과 오랜 수험생활

오늘날도 '고시 낭인'이란 말이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과거 폐인'이 흔했다. 대개 열 살 안팎에 과거 공부를 시작한 아이들은 최소 10년, 길게는 20~30년을 과거 준비에만 몰두했다. 20~30년 이내에 급제하면 '인재'로 취급될 정도였으며, 실제로 80~90세까지 시험을 치르는 장수생도 적지 않았다.
 
관직 진출 경쟁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과거시험의 문과 합격 정원이 33명 정도로, 10개 고을에서 한 명도 나오기 힘든 정도였다. 정기시험 이외에도 특별시험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수천 명이 응시하는 가운데 합격률은 3% 내외에 불과했다.
 
 

수험생 일상과 가족의 희생

과거 준비에는 경제적 기반이 꼭 필요했다. 몇십 년간 생업 대신 공부에 매진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아내나 가족 부양은 온전히 다른 식구들의 몫이었다.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 타지 유학을 하거나, 선묘·숙소·강학 활동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아 연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4~6개월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있다.
 
실력 외에도 운, 가문의 정치적 배경(붕당), 경제력 등도 합격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집안의 존속과 명예, 가문의 운명이 한 사람의 시험 결과에 달려 있었으니, 선비 본인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긴장된 수험생활을 함께 했다.
 
 

** 최고령 급제자, 정순교의 집념

조선 후기 과거시험 최고령 합격자는 무려 85세에 합격한 정순교입니다. 평생을 과거 준비에 매진했으나 번번이 낙방했지만, 늦은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습니다. 마침내 합격하자 임금은 그의 나이에 감탄해 곧바로 정3품 관직을 내렸으나, 정순교는 합격의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이야기는 “평생 노력하면 언젠가 결실을 맺는다”는 메시지로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조선식 ‘사교육’과 공부법

오늘날 유명 입시학원, 과외, 족집게 강사와 비슷한 형태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인조 시대에는 ‘암기 위주 학원’이 생겨나서 합격률을 높였고, 서울에는 수십~백여 명이 모여 강의를 듣는 대형 입시학원이 있었다. ‘숙사’라 불리는 입주 과외 선생님, ‘족집게 강사’ 역할을 한 학자, 요점 정리집(초집), 기출문제·모범답안집까지 다양하게 활용됐다.
 
또한 동국장원책이나 동국장원집 등 이전 장원급제자의 답안집이 기출문제은행처럼 통용됐다. 요약본, 암기장, 교재 등 조선 선비들의 흥미로운 공부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낙방과 좌절, 그리고 마지막 기회

매번 과거에 낙방하는 수험생도 많았다. 수십 년을 공부해도 합격하지 못하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됐을 때, 이미 준비를 마친 이들은 한순간에 ‘단절된 세대’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제한은 완화됐지만, 여전히 평민과 상민은 경제·교육적 여건상 과거에 도전하는 것이 극히 힘들었다. 드물게 성공한 서민층이 사회적 신분상승의 꿈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주류 양반의 벽은 높았다.
 
 

** 천재도 낙방의 쓴맛을 보다, 퇴계 이황

우리에게도 익숙한 퇴계 이황 역시 과거시험에서 여러 번 실패를 맛본 인물입니다. 그는 예비시험 소과에서 세 번이나 낙방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 스물일곱에 소과, 서른셋에 대과에 합격했습니다. 당시 천재라 불렸던 인물들도, 낙방의 좌절을 이겨내며 오랜 수험 생활을 겪었다는 점은 오늘날 수험생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의 취업 준비생 못지않게 기적, 좌절, 가족의 이야기 등 인간적인 면모가 깃든 생생한 일화가 존재합니다.

 
 

조선 취업 준비생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의 삶

조선시대 취업 준비생의 삶은 고단하면서도 치열했다. 시험 하나에 집안은 명멸했고, 수많은 젊은이와 가족이 수십 년간 한 가지 목표에 몰두했다. 공부, 경쟁, 가족의 희생, 지원과 실패—이 모든 키워드는 2020년대 대한민국과도 맞닿아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수험생의 삶을 통해 우리는 과도한 경쟁 사회의 뿌리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 과거 속에서 배울 점과 교훈을 오늘날 삶에 녹여 본다면, 경쟁뿐만 아니라 진짜 ‘성장’과 ‘공존’의 가치를 찾는 데 한 걸음 다가서지 않을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과거 (科擧)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562

 

과거(科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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