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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여진과의 관계와 동북 9성 : 북진정책의 야심과 한계

이모는오늘도 2025. 9. 21. 15:45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반까지 한반도 북방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설치, 그리고 그 반환 과정은 고려의 북진정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동의 핵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고려시대 여진과의 관계와 동북 9성 : 북진정책의 야심과 한계 / 이미지 출처 : 우리역사넷

 
 

고려와 여진족의 초기 관계

화내정책과 기미책략

고려 건국 초기 여진족은 만주와 한반도 북방 일대에 흩어져 부족 단위로 생활하며, 발해 멸망 이후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자립적 생활을 이어갔다. 고려는 이들에 대해 **화내정책(化內政策)**을 실시하여 여진족의 조공과 내조를 허락하고, 추장들에게 작위와 관직을 주는 회유정책을 펼쳤다.
 
여진족은 고려에 말, 활, 모피 등을 바치는 대신 의류나 식량 등 생활필수품을 들여가며 상하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거란 침입 때는 고려의 군인으로도 참여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려 조정은 여진 추장에게 관작을 주어 고려의 번병 역할을 하는 기미주(覊縻州)와 귀순주(歸順州)로 삼아 정착하도록 하였다.
 

완안부의 등장과 갈등 심화

11세기 후반 여진족 내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완안부(完顔部)**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104년(숙종 9년) 완안부 추장 완안오아속(烏雅束)이 다른 부족장 부내로(夫乃老)와의 갈등으로 기병을 이끌고 정주성까지 진격해 진을 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는 변방 장수 이일숙(李日肅)을 통해 여진 추장들에게서 완안부의 진짜 목적이 고려 침공이라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기존의 평화적 기미정책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별무반 창설과 여진 정벌

1차 정벌의 실패와 별무반 편성

1104년 임간(林幹)이 여진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어 윤관(尹瓘)이 나아가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윤관은 패배의 원인이 기병 중심인 여진군과 보병 중심인 고려군의 차이라고 판단하고, 국왕에게 건의하여 새로운 군사조직을 편성했다.
 
**별무반(別武班)**은 당시 정식 직임을 갖고 있는 문무 관원과 과거 응시자, 일부 승려 등을 제외한 양인 신분의 남성들을 중심으로 편제한 특수 군사조직이었다. 말을 가진 자는 **신기군(神騎軍)**으로, 승려는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으로, 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신보군(神步軍)**이나 도탕(跳盪), 경궁(梗弓), 정노(精弩), 발화군(發火軍) 등의 특수군으로 편성하였다.
 

2차 정벌의 대성공

1107년(예종 2년) 12월 1일,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은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출발하여 본격적인 여진정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속전속결 전략으로 135촌을 격파하여 약 5,000명을 죽였으며 사로잡은 포로도 많았다.
 
전투 결과 '그 지방이 300리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蓋馬山)에 닿았으며 남쪽은 장주(長州)·정주(定州)에 접한다'는 대규모 영토를 확보했다. 1108년 4월 9일 윤관이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백여 두를 바치며 개경으로 개선했다.
 
 

동북 9성의 설치와 의미

9성의 구성과 위치

윤관은 새로 개척한 영역에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 복주(福州), 공험진(公嶮鎭), 통태진(通泰鎭), 숭녕진(崇寧鎭), 진양진(眞陽鎭) 등 9개의 성을 축조했다. 이 중 공험진은 9성 중 가장 북쪽 거점으로, 여기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글이 새겨진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실제로는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 깊숙이까지 고려의 영토가 확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 의미와 한계

동북 9성은 강동6주와 더불어 고려의 북진정책과 영토 확장의 상징이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로서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의 구현체였으며, 당시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군사력과 영토적 야심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다.
 
하지만 설치 직후부터 통치에 큰 어려움이 따랐다. 주변 지역이 매우 넓은 데다가 완안부 세력이 산 속에 거주하면서 집요하게 약탈하며 9성의 반환을 애걸했고, 여진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국력이 소모되었다. 또한 향후 거란과도 다툴 수 있다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동북 9성의 반환과 그 결과

반환의 배경과 과정

고려 조정 내부에서는 동북 9성 유지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졌다. "서경 이남만 잘 다스려도 충분하다"는 현실론이 대두되었고, 여진의 끈질긴 요청과 국경 불안, 막대한 유지비용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109년(예종 4년) 7월, 고려는 결국 설치 1년 7개월만에 이주한 백성을 본거지로 되돌려보내고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야심찬 북방 개척의 시도는 인적, 물적 손실만을 남기고 고스란히 포기되었다.
 

완안부의 금나라 건국

동북 9성을 반환받은 완안부는 이를 발판으로 만주 일대를 장악했다. 1115년(예종 10년) 완안 아골타(阿骨打)가 금나라를 건국하여 거란(요)을 멸망시키고, 고려와 송을 압박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금나라는 발해와 요나라의 옛 영토를 점유하며 계속 남하하여 중국 본토의 북반부를 차지하고, 송나라와 회수(淮水)를 경계로 삼게 되었다. 고려에게는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관계에서 조공을 요구하는 상국으로 관계가 역전되었다.
 
 

역사적 평가와 의의

북진정책의 성과와 한계

동북 9성의 설치와 반환은 고려 북진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군사적으로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지정학적 여건과 국력의 한계로 인해 영토 확장의 성과를 지속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동북 9성의 경험은 이후 진행된 영토 개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고려말 공민왕 대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탈환한 후 진행된 영토 개척에서 동북방 영역이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내세우는 근거가 되었으며, 조선 초기까지 이어진 북진 개척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동북 9성 반환은 단순한 영토 포기가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여진족이 고려의 기미정책 대상에서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이후 몽골 침입까지 이어지는 외침의 연속선상에서 고려 대외정책의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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