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단순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사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31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면서도 교육자, 사업가, 의병장, 사상가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며 민족의 미래를 위해 헌신했던 그의 삶을 되돌아보겠습니다.
어린 시절의 정직한 성품
안중근 의사의 인격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던 벼루를 몰래 쓰다가 실수로 깨뜨린 일화는 그의 정직한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하인이 "제가 깨뜨렸다고 말할게요"라고 했지만, 어린 안중근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솔직하게 말씀드린 후 종아리에 피멍이 들 정도로 회초리를 맞았지만, 그는 하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아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마음은 편합니다. 아프고 괴롭지만, 마음이 편한 것, 이것이 정직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정직함과 용기는 훗날 강인한 독립운동의 정신이 되었습니다.
개화사상과 천주교 신앙
안중근 의사는 16세 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서양의 학문을 배우며 근대 사상에 눈을 떴던 그는, 프랑스어와 서양 문물을 익히며 민족의식을 키워갔습니다. 아버지 안태훈의 개화사상 역시 그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배경은 그가 후에 교육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나서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활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안중근 의사는 깊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프랑스 신부의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의 진흥이 가장 중요하다"는 충고를 들고 귀국한 그는, 1906년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삼흥학교에서는 영어 등 외국어 교육과 함께 군사 훈련과 같은 교련 교육을 실시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실력을 키워주려 했습니다.
항일 의병 투쟁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 김두성 등과 함께 의병을 양성하여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08년 6월에는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과 경흥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안중근 의사가 국제법에 따라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보내게 되어 있다"는 만국공법에 따른 조치였으며, 이는 그의 천주교적 박애주의와 인도주의적 성품을 보여줍니다.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
1909년 3월 2일, 안중근 의사는 노브키에프스크에서 김기룡, 엄인섭 등 12명의 동지와 함께 단지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써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쓰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습니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를, 김태훈은 이완용의 암살을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이토는 복부와 등에 세 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꼬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의 숭고한 정신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이 사형 선고를 받자 놀라운 편지를 보냈습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라며 아들에게 의로운 죽음을 권했습니다. 그녀는 직접 수의까지 지어 보내며 아들의 신념을 지지했습니다.
동양평화론과 미래 비전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일본이 주장하는 거짓된 동양평화론을 비판하며, 한국·중국·일본 삼국이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로 제휴하여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구상에는 동양평화회의 조직, 공동은행과 화폐 창설, 국제평화군 창설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는 1993년 출범한 유럽연합보다 앞선 근대 아시아 평화 구상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5가지 이유를 재판에서 당당히 밝혔습니다. 그는 개인적 원한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조선을 침략한 적을 처단했다고 주장하며, 일본 제국 헌법이 아닌 국제법을 적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순국과 영원한 유산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항소하지 않고 감옥에서 『동양평화론』 집필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평화 의지에 일본인 간수조차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는 31세의 나이로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다른 사형수와 달리 의자에 앉아 사형을 당했는데, 이는 그를 존경했던 교도관들의 배려였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남긴 정신과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삶은 개인의 영달보다 민족의 미래를, 자신의 안위보다 조국의 독립을 택한 숭고한 희생정신의 표본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 정직함부터 의거 당시의 당당함, 그리고 감옥에서의 평화 사상까지, 모든 것이 일관된 신념과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평화와 정의에 대한 염원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