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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의 정치적 의미 : 세종이 세상을 바꾼 이유

이모는 2025. 8. 3. 15:41

새벽빛이 채 가시기도 전, 조선 땅에는 한 가지 위대한 결심이 맺어졌습니다. “내 백성이 무지로 억울하게 죽거나 삶의 기회를 빼앗기지 않도록,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쓰는 글자를 만들라.” 이 한마디에서 시작된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 창제가 아니었습니다. 권력과 지식이 소수에만 독점되던 시절, 세종대왕은 민본(民本)의 이념을 바탕으로 정보와 소통의 문턱을 낮추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태어난 28글자는 곧 백성의 권익을 수호하는 도구가 되었고, 조선사회를 민주적·복지국가의 토대로 이끌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훈민정음이 탄생한 배경과 정치적 의의, 그리고 그로 인해 펼쳐진 사회·민생 변화의 드라마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세종이 세상에 선사한 문자 혁명의 진정한 가치를 오늘 여러분과 함께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정치적 의미 : 세종이 세상을 바꾼 이유

 

 

 

1. 훈민정음이란 무엇인가?

훈민정음은 1443년 세종대왕에 의해 창제되고 1446년에 반포된 조선 고유의 문자입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처럼,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평민들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창제 당시 자음 17자와 모음 11자, 총 28자로 구성되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일, 창제자, 창제의 기본원리가 모두 알려진 문자입니다.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 개혁이 아니라 정보의 민주화를 통한 사회변혁의 도구였습니다. 기존에는 한자만 사용되어 지식이 소수 양반층에 제한되었지만, 훈민정음의 등장으로 문자와 정보의 접근성이 평범한 백성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

 

2. 15세기 조선, 왜 새로운 문자였나

15세기 초 조선은 한문(한자)이 국가 공식 문자였고, 관료나 학자 등 극히 일부만이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평민들은 한자로 기록된 법이나 공문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하기 어려웠습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평민들이 법을 몰라서 그릇된 판결을 받는 경우가 빈번했고, 죄인을 다스리는 관리들도 한자로 된 문서의 뜻을 잘못 이해해 그릇된 판결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1428년 진주에서 발생한 김화(金禾)의 친부 살인 사건은 세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세종은 이 패륜 사건을 보며 백성들을 엄하게 벌하고 다스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이 죄를 저지르기 전에 그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자로 된 《효행록》이나 《삼강행실도》를 만들어도 백성들이 읽을 수 없었기에,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새로운 문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3. 훈민정음 창제의 정치적 배경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히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대부 중심의 지식 독점을 타파하고 왕 중심의 국가 체제 강화와 민본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세종의 강한 정치적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형사학 연구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배경에는 '사법적폐를 청산해 환난을 막아보려는 의도'가 강력하게 작용했습니다.

세종은 즉위하면서 '어진 정치(仁政)'를 다짐하고 사법적폐 청산을 위해 노력하다가, 한자의 장벽에 부딪혀 새로운 문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훈민정음 창제를 감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대 반대 세력인 집현전 일부 학자나 유림은 훈민정음 도입이 유교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고 우려했으나, 세종은 '백성을 위한다'는 원칙을 굳게 지켰습니다.

세종은 한글 창제를 은밀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집현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최만리조차 한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는 만약 사전에 알려졌다면 반대 세력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한글 창제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4. 세종대왕의 의도와 시대 변화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통해 권력이 백성에게 전이되는 기반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용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을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한 자가 많다. 내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써서 날로 사용함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고 밝힌 창제 동기에서 세종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세종은 농사, 의료,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한글로 기록해 보급했습니다.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이 훈민정음을 통해 널리 전파되어, 실생활에 바로 유용한 지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관료사회뿐만 아니라 평민, 더 나아가 노비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든 조선사회의 혁명적 변화였습니다.

세종의 민본정신은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측우기, 자격루 같은 과학 기구의 발명에서도 그 꽃을 피웠습니다. 1441년 세계 최초로 발명된 측우기는 전국 관청에 보급되어 농민들이 지역별로 정확한 강우량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고, 1434년 완성된 자격루는 백성 누구나 시간 정보를 쉽게 알 수 있게 했습니다.

 

5. 한글이 이끈 사회적/정치적 변화

훈민정음의 확산은 사회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백성들은 더 이상 '글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고, 문서작성이나 소송, 신문고 제도 등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직접 진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종은 1432년 늦가을 어느 날 신하들에게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을 알아야 죄를 짓지 않고 그릇된 행동을 스스로 고칠 수 있다며, 큰 죄와 관련한 법이라도 따로 뽑아서 이두로 번역해서 반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운다"고 할 정도로 배우기 쉬웠습니다. 이로 인해 한문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노비들도 글자를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글은 조선 후기 민중이 정치·사회적 의견을 피력하는 데 쓰였고, 이후 동학, 3.1 운동 등 근대 민주주의 운동의 언어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445년에는 《용비어천가》가 훈민정음으로 된 최초의 기록물로 편찬되어,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알리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6. 훈민정음과 민중 복지

훈민정음 창제는 곧 복지의 시작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법적·행정적 권리 접근성이 대폭 향상되어, 취약계층도 필요한 복지정보와 제도 이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세종의 민본정치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라는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 정책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세종은 노비도 천민(天民)으로 여기며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양로연에서는 노비까지 포함하여 155명의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한글로 조세, 입법, 농업기술을 쉽게 전달해 백성 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했습니다. 특히 《의방유취》 같은 의료서적을 한글로 만들어, 평민뿐 아니라 멀고 먼 시골의 백성까지 건강관리 정보를 알 수 있게 했던 일화가 대표적입니다. 세종 25년에는 온천 근방의 농민 남녀 923명에게 음식을 베풀고, 인마가 밟아 손상을 입힌 보리밭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해주었습니다.

 

7. 한글, 조선을 새롭게 하다

훈민정음 창제의 정치적 의미는 단순한 문자 개혁을 넘어선, '백성을 위한 나라'라는 이상 실현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이 알 권리, 말할 권리를 가진 사회'로의 한걸음을 내딛으며, 조선의 정체성과 복지정책의 토대를 마련한 혁신가였습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1444년 2월 20일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리며 "중국과 글, 법도를 같이해왔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다"고 비판했지만, 세종은 "설총의 이두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한글은 우리 사회의 정보 평등과 복지의 상징이자, 모든 국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세종이 "내 백성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라"는 어명을 내린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이념적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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