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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과 고구려 영토 확장의 모든 것

고구려 최대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년)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군주입니다. 본명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386년 13세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391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412년까지 22년간 재위했습니다.그의 왕호인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으로, 완전한 왕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입니다. 이는 그가 묻힌 언덕 이름을 뜻하는 '국강상', 땅을 넓혔다는 '광개토경', 백성들이 편안하도록 다스렸다는 '평안'을 모두 담고 있어 그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전방위적 영토 확장 정책남방 진출 : 백제 정복과 한반도 패권광개토대..

세종대왕릉 : 성군의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서

목차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한 세종대왕릉은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잠들어 있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한글 창제의 위대한 업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성군의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역사 속 이야기와 함께 그 의미를 되새겨보겠습니다. 세종대왕릉의 역사와 특별함세종대왕릉(영릉, 英陵)은 조선왕릉 최초의 부부 합장릉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세종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자리했던 이 능은 1469년(예종 1년) 현재의 여주로 이장되었습니다.이장의 배경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세종 사후 왕실에 연이은 불행이 일어나자, 당시 지관과 풍수지리가 들은 능의 위치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세종의 아들들인 문종의 단명과 단종의 왕..

조선의 청소년 범죄 :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범죄는 존재했습니다. 조선은 유교적 가치를 중시했던 사회였으며, 미성숙한 아동과 청소년을 단순히 처벌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교화와 교정을 통해 변화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범죄 유형과 상황에 따라서는 엄격한 처벌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청소년 범죄의 유형과 특징연령과 신분: 보통 범죄의 주체가 되는 청소년은 10세~15세 사이였고, 신분적으로는 양인(평민)이나 노비 남아가 주를 이뤘습니다. 특히 7세 이하의 아동은 법적으로 책임이 거의 없거나 제한적으로만 인정받았습니다.주요 범죄 유형: 절도나 강도 범죄가 대표적이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큰 범죄보다는 생활형 범죄가 많았습니다. 그에 따라 처벌의 수위 역시 범죄의 종류, 피해 ..

조선 시대의 퇴마 의식 : 현실과 신앙이 교차하는 한국 오컬트의 원형

조선 시대는 유교가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은 시기였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은 각종 재난, 질병, 불운, 그리고 설명 불가한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달래기 위해 다양한 퇴마 의식을 실행했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퇴마 의식이 실제로 어떻게 행해졌는지, 누가 퇴마를 담당했으며, 어떤 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지 깊이 있게 살펴본다. 1. 조선 시대에 '퇴마 의식'은 무엇이었을까?‘퇴마’라는 단어는 최근 들어 대중매체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오히려 '벽사(辟邪)', '귀신을 물리친다(攘邪)', 혹은 '축귀(逐鬼)'와 같은 표현이 주로 쓰였다. 조선인은 악귀, 잡귀, 원혼 등의 ‘나쁜 기운’을 인간의 삶과 건강, 복에 피해를 입히는 존재로 생각했고, 이를 몰아내는 각종 의식을 통칭..

위험 속에서 기록한 역사 : 신채호·장덕준 등 항일 언론인들의 생생한 일화

펜 끝으로 맞선 항일의지일제강점기, 언론인과 기자들은 단순한 보도자를 넘어 조국의 독립과 국민 계몽을 위해 목숨을 건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습니다. 일본의 철저한 언론 탄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사회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억압된 언론, 검열된 사상, 억지로 강요된 ‘황국신민’의 길. 그 속에서 ‘펜’만으로 맞섰던 언론인들은 시대적 양심이자, 독립운동의 또 다른 전사였습니다. 그들의 투쟁 속에는 뜨거운 용기와 사명감, 그리고 민족을 위한 애틋한 사랑이 서려 있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신채호 : “내 목숨보다, 진실이 우선이었다”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많은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언론투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신..

조선시대 간첩 활동의 모든 것 : 세종대왕의 체탐인부터 황옥 사건까지

조선의 은밀한 첩보전, 국가를 지킨 그림자들조선시대 하면 유교적 질서와 평화로운 농업사회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첨예한 대외관계와 국가 안보를 위해 치밀한 정보활동이 이루어졌던 시대였다. 특히 세종대왕 시절에는 체계적인 첩보부대까지 조직하여 운영했을 정도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이 활발했다. 세종의 비밀 첩보부대 '체탐인' - 조선의 특수부대조선 초기 가장 주목할 만한 첩보 활동은 세종 15년(1433년)에 창설된 **체탐인(體探人)**이다. '몸소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들은 현재의 특수부대나 첩보원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체탐인의 임무와 활동체탐인의 주요 임무는 두 가지였다:국경선 근처에서 여진족이 침입할지 여부를 감시하는 일여진족 본거지로 깊숙이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전쟁 영웅이 되지 못한 비운의 장수들 :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영웅이 되지 못한 장수들의 슬픈 운명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화려한 승리와 영광으로 기억되는 전쟁 영웅들 뒤에는 뛰어난 능력과 충성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음모, 또는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장수들이 있다. 이들은 전쟁에서의 승리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억울한 누명으로 더 기억되는 인물들이다. 백제의 마지막을 지킨 두 장수계백장군 : 황산벌의 비극적 영웅백제 멸망 직전인 660년, 나당연합군 5만 명이 백제를 향해 쳐들어왔을 때 단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맞선 장수가 있었다. 바로 계백장군이다. 그는 출전 전 자신의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전장으로 나갔다.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으니, 내 가족이 포로가 되어 노예로 끌려가는 것보다..

단일민족 신화 깨기 : 한국 역사를 바꾼 귀화인의 숨은 이야기

한국의 역사는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와 달리 실제로는 다양한 외국 출신 인물들이 함께 만들어온 다문화의 연속체였습니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귀화인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며 정치, 문화,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들의 정착 과정은 단순한 외부인의 동화를 넘어 한국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귀화인들임진왜란의 영웅, 김충선(사야가)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가장 극적인 귀화 사례가 펼쳐졌습니다. 일본군 장수 '사야가(沙也可)'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우선봉장으로 조선에 침입했지만, 조선의 문물과 풍속에 감화되어 부하 3,000여 명과 함께 귀화를 결심했습니다.사야가는 조선에 상륙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조선 백성들에게 효..

조선 왕들의 숨겨진 반려동물 집착 : 궁궐 속 특별한 동물 이야기

조선 시대 왕실은 엄격하고 권위적인 공간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따뜻하게 동물을 아끼고 사랑했던 왕들과 궁궐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단순히 취미 이상의 이유로 동물을 기르고, 때로는 그들만의 특별한 의미를 담아 반려동물을 돌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 왕실이 키운 동물들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 그리고 왕실 동물관의 문화적 배경을 조명해 봅니다. 1. 조선 왕실의 ‘펫 문화’와 동물관조선 왕실이 길렀던 동물은 개와 고양이, 매, 말 같은 평범한 동물뿐 아니라, 사슴, 두루미, 원숭이, 심지어 외국에서 온 코끼리, 낙타, 앵무새, 학 등까지도 다양했습니다. 이 동물들은 왕의 취향이나 관리 목적에 따라 선택되었으며, 외국에서 온 희귀 동물은 외교의 상징 또는 국가 ..

퀴어 한국사, 소수자 역사 보기 : 우리가 몰랐던 ‘다른 목소리’들의 시간

보이지 않았던 역사, 숨겨진 삶을 기록하다한국 사회의 주류 역사 서술은 오랜 시간 동안 시스젠더와 이성애 중심의 관점으로 채워져 왔습니다. 하지만 단군신화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치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묻혀 온 퀴어와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곳곳에 아주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퀴어 한국사》와 같은 연구와 기록, 그리고 퀴어 아카이브 등이 이러한 흔적을 한데 모아, 365개의 일화로 우리의 시선을 과거 ‘숨어 있던 목소리’로 이끕니다. 퀴어의 흔적, 어디서 찾아볼 수 있었나고대와 조선: ‘붕’(朋) 자를 새긴 궁녀들의 연대조선시대 궁녀들 사이에는 특별한 우정(혹은 더 친밀한 관계)을 맺은 이들이 팔이나 엉덩이에 ‘붕’(朋) 자를 문신하는 풍습이 있었던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는 일반..

여인전부터 대부호까지 : 조선 여성 상인의 숨은 이야기

조선시대는 유교적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게 지배하던 사회였지만, 경제의 현장에서는 여성들도 굳건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여성 상인은 때로는 집안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한 사회의 민생을 책임지는 상업의 주체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조선시대 여성 상인의 여러 활동상과 생생한 일화들을 통해 그녀들의 사회적 의미를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1. 시장과 거리에서 활약한 여성조선 후기에는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로 5일장, 시전 등 다양한 상업공간이 성장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여성들도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는데, 특히 생선, 빗, 바늘, 장신구 등 여성의 생활과 밀접한 품목의 행상이나 방물장수로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닷가에서는 어부의 아내들이 생선을 이고 다니며 직접 판매..

조선시대 호랑이 : 위험과 상징의 이중적 존재

조선시대 호랑이는 단순한 야생동물을 넘어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호랑이는 산을 지배하는 '산군(山君)'으로 여겨졌으며, 동시에 위험한 포식자로서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호랑이는 이러한 이중적인 이미지 속에서 조선 사회와 문화 전반에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호랑이 피해와 사회적 문제 '호환'조선시대 호랑이 피해는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였으며, 이를 '호환(虎患)'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영조 10년(1734년) 한 해에만 전국에서 약 140명의 사망자가 호랑이로 인해 발생했다고 전해집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영조 30년에 경기도에서만 한 달 동안 무려 120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는 기록입니다.태종 16년(1416년) 겨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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